마경찬의 여행편지2011. 7. 7. 06:00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의 저녁식사, 신이 내린 식탁이라는 별명답게 풍성한 식단이 한층 입맛을 자극했습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자그마한 무대에 예쁜 금발의 여가수가 올라왔습니다. 그녀는 우리나라에도 번안되어 널리 알려진 ‘백만송이 장미’라는 노래를 부른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 푸가체바와 이미지가 참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재빨리 ‘백만송이 장미’를 불러달라고 신청곡을 전달했더니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3년 전 러시아와 전쟁을 치른 그루지야에서는 러시아 노래를 부르는 게 금지되었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게는 약 4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망설이던 그녀는 백만송이 장미를 감칠맛 나게 불러주어 우리 일행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루지야에 들어오면서부터 이 노래를 꼭 듣고 싶었던 터였습니다. 이유는 그루지야 출신의 화가 삐로스마니의 사랑이야기 때문입니다. 

전설적인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더구나 슬픈 사랑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1862년 그루지야의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님을 잃고 양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12세에 가출, 평생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로 막노동일과 트빌리시 기차역의 하역부로 일을 하면서 하루 벌어들인 돈을 선술집에서 술 마시는 데 쓰는 게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한가지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림이었습니다. 그는 틈틈이 그림을 그려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어딘지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여행하던 한 프랑스인이 우연히 그의 그림을 사들고 파리로 돌아가 화랑에 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그의 그림은 당시 파리 화단에 제법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그림이기에 더더욱 신선한 화풍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어느 순간 그의 그림은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니코 삐로스마니는 난생 처음 자신의 집을 구입할 정도로 경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글픈 사랑이 운명처럼 찾아왔습니다. 트빌리시에 공연 온 유랑극단의 삼류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그만 한눈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한번만이라도 만나주기를 간청했으나 마르가리타에게 이 시골뜨기 화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니코 삐로스마니는 집을 팔았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그림도 헐값에 급매로 처분했습니다. 그 돈으로 트빌리시 일대에 있는 모든 장미꽃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곤 밤새 마르가리타가 묵고 있는 숙소 앞 골목을 백만송이의 장미로 장식했습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가장 화려한 프로포즈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가리타는 돈 많은 부자를 따라 도시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삐로스마니는 모든 것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기차 하역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선술집에서 다시 술을 마시며 남은 인생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63년이 지난 후 알라 푸가체바의 노래 ‘백만송이 선홍빛 장미’로 그 처절한 사랑이야기는 되살아났습니다.




다음날 다비드 가레자 수도원을 찾아 벌판을 가로질러 달려갔습니다. 수도사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신의 사랑을 갈구하며 다가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는 백만송이 장미 대신 수백만 송이의 야생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그 길을 산책하면서 ‘백만송이 장미’의 노랫말이 입가에서 자꾸만 흥얼거려졌습니다.

다시 저녁식사 시간, 이번에 찾아간 식당 이름이 하필 ‘마르가리타’였습니다. 벽면은 온통 니코 삐로스마니의 슬픈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 여인의 사랑을 얻고자 모든 것을 던져버린 삐로스마니를 위해, 그리고 또 신의 사랑을 품고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어던진 수도사들을 위해 건배를 외쳤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