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4. 7. 31. 06:00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소절이다. 난 묘하게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나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을 가면 이 시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완만한 구릉지에 빼곡히 심어 놓은 밀밭 사이로 난 황톳길이 차창 밖으로 지나갈 때면 여지없이 그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가고 싶다. 그런데 그 꿈을 지난달의 토스카나와 돌로미테 여행에서 이루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밀밭과 포도밭이 이어지는 풍요로운 평원 사이사이에 시에나, 산 지미냐노, 몬테리지오니 등 주옥같은 중세도시가 점점이 박혀있는 곳이다. 이 멋드러진 마을들을 뒤로 하고 끝없이 밀밭길이 펼쳐지는 발도르시아의 벌판에 멈춰 섰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다는 그곳에는 오늘도 푸른 밀밭이 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막 비가 개인 후라 코끝에 감기는 싱그러운 공기를 호흡하며 밀밭길을 걸었다. 6km에 달하는 이 구간에서 우리 일행들 이외에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길은 관광코스가 아니라 평범한 농촌의 농로였기에 그랬다.


 

지평선까지 맞닿은 밀밭 복판에 외롭게 서있는 한그루 나무가 시간을 정지시키고, 언덕위에 도열해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공간 감각을 마비시켰다. 어느 순간부터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이 하나의 점으로 생각되었다. 그랬다. 이따금 터지는 우리 일행들의 웃음소리와 길가에 피어난 들꽃들이 현실감각을 일깨워줄 뿐, 나는 정말 꿈속을 가듯 이 길을 걷고 있었다.

 

친퀘테레와 포르토피노로 대표되는 리구아나 해안을 돌아본 후 이번에는 돌로미테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그랜드 돌로미테라 불리는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험한 고개를 넘나들며 남성적인 돌로미테의 산악미를 감상했다. 하지만 산을 품는데 있어 걷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법, 다음날 10km에 이르는 트레킹을 감행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2,000m가 넘는 알페 디 시우시에 올라서니 그림 같은 초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걸을 곳이었다.



초원 사이에 멀리 웅장한 바위산을 배경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길이 이어졌다. 지천에 흐드러진 야생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지나온 길이 아까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3시간의 트레킹이 혹시라도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는 하이킹코스이기에 이런 곳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전혀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피곤한 기색은커녕 10km가 너무 짧다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일행이 더 많았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돌로미테에서도 우리는 꿈속을 거닐었던 것 같다.

 

귀국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도대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토스카나의 밀밭길과 돌로미테의 초원길, 그 길을 걸었던 순간들이 벌써 아련하게 생각된다. 한바탕 멋지고 행복한 꿈을 꾸고 난 것처럼 난 아직도 그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마경찬]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