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이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에게 여행 욕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나 결국 유럽의 기원이 된 크레타 문명 이야기는 이 섬을 한없이 신비로운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대학때 읽은 '희랍인 조르바'는 결정적으로 '언젠가 반드시 크레타를 가보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했습니다.

그러했으니 실제로 크레타에 발을 디뎠을 때 난 무척 흥분돼 있었습니다.







산토리니에서 출발한 배는 약 3시간여만에 크레타 섬의 수도역할을 하는 이라클리온의 부두에 나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크레타 섬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크노소스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미로가 바로 저런 것일까요?

전설로만 나돌던 코노소스 궁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더 에반스가 발굴에 성공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창 복원 사업중인 크노소스 궁전은 한변이 160m 이고, 건물 높이는 4층이상이며, 방이 무려 1,200개 이상이었던 거대 궁전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때 에게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채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던 크레타의 중심 궁전다운 모습입니다.







한참 후 그리스 폴리스의 중심이자, 결국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된 아테네도 크레타 전성시절엔 조공을 마치는 볼품없는 나라였습니다.

아테네는 9년마다 7명의 젊은 남성과 7명의 처녀를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에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스스로 제물로 위장하여 미궁으로 들어갑니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는 괴물을 죽인다한들 어떻게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진 테세우스 왕자. 하지만 왕자의 고민은 늘 공주가 해결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테세우스 왕자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 공주는 아테네로 함께 가 결혼을 한다는 약속을 받고 그 해결책을 알려줍니다. 바로 실뭉치의 끝을 잡고 들어갔다가 다시 실을 따라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공주덕에 테세우스 왕자는 무사히 괴물을 처치하고 크노소스의 미로를 빠져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에게해의 낙소스 섬에 공주를 그냥 버려두고 혼자 아테네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알고보니 방법이 너무 간단했기 때문일까요?

그 후 아리아드네 공주는 우여곡절끝에 자신을 구출한 디오니소스 신과 결혼 했습니다. 그 후의 테세우스 왕자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역사는 무려 3700여년이나 됩니다. 당시의 벽화나 항아리 같은 도구들을 보면 크레타 문명이 얼마나 고차원의 문명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크레타 섬의 땅은 아주 비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의 올리브 전체 수확량의 절반은 크레타에서 납니다. 포도 역시 풍성하게 납니다. 이런 것들이 크레타가 부유해진 원천이 되었고, 고대 문명까지 낳게 한 힘이 되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을 보면 이런 곡물을 저장하던 창고가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한 크노소스 궁전의 급수와 배수 시설은 현재의 토목기술로 보아도 굉장한 수준으로 찬사받고 있습니다. 이는 크레타의 부유함을 가져온 농사의 관개 기술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유적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도 크레타의 고고학 박물관은 반드시 봐야 합니다. 크레타에서 발굴된 모든 유적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역사책에서 나오는 '미노아 문명'은 크레타 문명과 같은 말입니다.

보통 에게 문명은 시대순으로 트로이 문명-크레타 문명-미케네 문명 세가지를 말합니다. 이 에게 문명이 고대 그리스 문명을 만들었고, 곧 로마로 퍼져 유럽의 문명을 만들었으니 크레타가 
유럽의 모태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의 4천년이 다 되어 가는 유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말 뛰어난 색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미노타우로스 때문일까요? 크레타의 유적중엔 소에 관한 조각품이 제법 많습니다.
 






현대 그리스의 사상가이자 그리스가 낳은 위대한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 하지만 무덤은 정말 소박합니다. 나무 십자가 하나가 다 입니다.

그는 1883년 크레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아테네에서 법학을,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대표작인 '희랍인 조르바'를 포함해 많은 소설과 희곡, 여행기를 남겼습니다. 그의 글에는 어떤 장르든 철학적 사색과 정신적인 여행이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으며, 나는 무엇에서도 도망가지 않는,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의 비문입니다. 평생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탐구하던 카잔차키스의 삶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바라 본 마을의 모습입니다.

















이라클리온에서 동쪽에 있는 말리아 마을쪽으로 조금만 나가면 매력적인 해변이 줄줄이 있습니다.







해변을 벗어나 크레타의 내륙으로 들어가서도 많은 고대유적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고르티스에 가보았습니다. 고르티스는 크레타 최초의 폴리스이며, 로마시절엔 크레타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시대 크레타의 대표 도시였던 곳인 만큼 고르티스엔 음악당 등 로마 유적들이 제법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찬란했던 크레타의 고대 문명 도시들은 기원전 100년 경 일제히 급격하게 쇠퇴하고 맙니다. 이 시기는 산토리니 섬의 대폭발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크레타의 쇠퇴도 산토리니 섬의 폭발로 인한 해일과 지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라클리온의 서쪽으로는 아르카디 수도원이 있습니다.







일견 평화롭고 한적한 수도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르카디 수도원은 그리스 독립의 기폭제가 된 곳입니다.







그리스는 15세기 이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할만큼 혹독한 식민지 시기였습니다.

그런 고난의 시기에 아르카디 수도원은 오스만투르크 제국 몰래 그리스어를 가르쳤고, 독립운동가들의 은둔처 역할을 했습니다.







최초의 독립전쟁을 일으킨 크레타 인들은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막강한 투르크군에 쫓기게 되었고, 결국 1천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아르카디 수도원으로 몰렸습니다. 투르크군 1만5천명과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은 아르카디 수도원에서 자폭하는 것으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서 마침내 그리스 전역으로 독립운동이 번져나가게 됩니다.

사진의 나무는 자폭 당시 파편을 맞아 고사했습니다. 












이런 역사 때문인지 아르카디 수도원은 엄숙하고 고즈넉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게해 여행을 마치고 다시 우리를 밤새 본토로 실어다 줄 대형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