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도시들은 대체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육중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대표적인 도시가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입니다.

'도나우강의 진주'라 불리는 부다페스트의 전모를 보기 위해 우선 겔레르트 언덕을 올랐습니다. 도심을 흐르는 도나우강을 경계로 서쪽은 부다, 동쪽은 페스트로 나눠진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다와 페스트가 한 도시가 된 것은 손쉽게 도나우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준 사슬교의 건립 덕입니다. 사슬교는 템즈 강의 런던 다리를 건설한 경험이 있는 영국의 교량전문가를 초빙해 1849년 완성되었습니다.

사진 왼쪽이 부다지구입니다. 언덕이 많은 부다지구는 이 지형을 이용해 왕궁이 들어서 있습니다. 반면 다리 오른쪽의 페스트는 거의 대부분 평지로 상업지구가 자리합니다. 사슬교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녹색지붕을 한 왕궁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뾰족한 첨탑이 있는 국회의사당이 보입니다.







부다페스트의 육중한 이미지를 결정하는 건축물이 바로 이 국회의사당입니다.

1885년 착공하여 1902년 완공된 국회의사당은 절충주의 건축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전체적인 외관은 네오고딕양식이고, 중앙의 커다란 돔은 르네상스,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헝가리 건축가인 슈테인도르 임레 작품입니다.







왕궁도 장중합니다. 도나우 강쪽에서 바로보면 더욱 위엄있어 보입니다.






부다페스트에 가면 무엇보다 겔레르트 언덕부터 올라가봐야 합니다. 이만한 전망대가 결코 없습니다.






겔레르트 언덕 정상에는 치타델라라는 요새가 있습니다. 치타델라엔 헝가리의 가슴 아픈 역사가 스며 있습니다. 






헝가리는 오랫동안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터키가 1700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헝가리는 유럽 최고의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 이래 주변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헝가리는 19세기 들어서 민족적인 자각이 일어났고, 이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립운동으로 번졌습니다. 이를 진압한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부다페스트를 감시하기 위한 요새를 만드는 데 바로 이 치타델라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치타델라의 불운은 계속되었습니다. 2차대전때는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러 들어오는 길에 바로 이 치타델라에 대포를 집중 배치해 부다페스트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 바람에 왕궁과 사슬교를 포함, 구시가지 대부분이 폐허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 헝가리를 해방시킨 건 소련이었습니다. 종려나무잎을 높이 들고 있는 여신상은 헝가리를 해방시키려다 사망한 소련군의 위령비로 세워진 것입니다. 원래는 아래쪽에 소련군 동상도 있었지만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한 동유럽 혁명 당시 철거되었습니다.






겔레르트 언덕을 내려와 왕궁으로 가보았습니다.






왕궁 입구엔 아기와 함께 나온 엄마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모차에 탄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마는 연주를 멈추고 황급히 아기를 달래다가 분유를 타주었습니다. 어디서든 먹고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참 안쓰러웠습니다.






부다페스트 왕궁은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전엔 부다페스트 북부의 에스테르곰이 헝가리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13세기말은 몽고가 세계로 뻗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헝가리 역시 수시로 몽고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위협을 느낀 벨라4세가 이곳으로 피신해 만든게 부다페스트 왕궁입니다.






사실 헝가리의 역사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그리 오래된 편이 아닙니다. 대략 이곳에 헝가리 왕국이 세워진 것은 9세기말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한창 기독교가 강성한 중세 시대를 맞고 있어서 그들 눈에 헝가리인들은 야만족이자, 아주 생경한 이교도 집단이었습니다.






헝가리 민족은 마자르 족입니다. 이 마자르 족이 역사적으로는 아주 흥미로운 민족입니다.

사실 마자르 족은 수수께끼같은 민족입니다. 그 역사가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 없어 학계에선 아직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은 마자르 족이 훈족의 후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HUN족에서 이름을 따와 국가명을 HUNGARY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왕궁안에서 놀던 헝가리 아이들의 뭔가 마뜩치 않은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훈족이라면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그 유명한 흉노족입니다. 훈족은 유럽인들에겐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중국의 한무제는 전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바로 변경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흉노 정벌에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이 결정이 세계의 질서와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물론 당시엔 아무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비의 날개 짓 하나가 거대한 폭풍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나비효과의 가장 극적이자 가장 거대한 예가 바로 한무제의 흉노 정벌입니다. 그리고 훈족은 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주연 배우였습니다.   







흉노족의 용맹무쌍함은 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정벌나온 그 유명한 한고조 유방을 오히려 포위, 간신히 목숨만 건지는 굴욕을 안겨준 게 흉노족입니다. 이후 한나라는 매년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막대한 뇌물과 여자들을 바쳐왔습니다. 사실상 조공이나 다름없었으니 천하의 한나라로선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암튼 한무제에 쫓겨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아난 흉노족에게 유럽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4세기경 동중유럽의 거의 대부분은 훈족에게 초토화되었습니다. 그 위대한 로마제국 조차 훈족에게 조공을 바치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훈족의 이동은 연쇄적인 민족 이동을 불러왔습니다. 원조 바바리안인 게르만족 역시 훈족에겐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훈족에 쫓긴 게르만족은 더 서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로마제국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암튼 이후 우여곡절끝에 훈족은 헝가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마자르 족은 훈족의 후예라는 설과 훈족을 정복한 다른 민족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지만 마자르 족 자체가 동방에서 왔다는 것은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부다 왕궁도 헝가리 역사만큼이나 온갖 수난을 겪어 왔습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한때 중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나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통에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또 다시 재건되었으나 19세기 대화재로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또 개축되었으나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부다 왕궁은 1950년대에 전후 복구된 것입니다.






왕궁을 나와 이번엔 어부의 요새로 갔습니다.






어부의 요새는 꼬깔모양의 첨탑들이 무척 독특했습니다. 어시장이 이 근처에 있어서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전투용으로 만든 요새가 아니라 도시 미관을 살리기 위해 건축되었습니다.











어부의 요새 자체도 멋지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페스트 지구의 전망이 무엇보다 훌륭했습니다.






어부의 요새 광장엔 헝가리 왕국의 초대왕이자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슈트반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초광각 렌즈 아니면 한 컷에 담기 힘들만큼 큰 마차슈 교회입니다. 역시 어부의 요새 내에 있습니다. 1541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선 150여년간 회교 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엔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대관식이 이곳에서 열렸는데 이 때 리스트의 그 유명한 '대관미사곡'이 작곡되었습니다.  






마차슈 교회 앞에 세워진 삼위일체 석주입니다. 체코의 올로모우츠와 마찬가지로 유럽 최악의 전염병이었던 페스트가 끝났음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왕궁 주변을 마차를 타고 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걷는 것 만큼 좋은 여행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사슬교를 건너 페스트 지구로 갑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