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2011. 3. 17. 06:00



일본의 지진 참사를 보면서 우린 물론 전세계가 두가지 점에서 놀라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참혹한 자연재해입니다. 화면에서 본 지진과 그에 이은 해일 참사는 경악 그 이상이었습니다.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 운운하는 것 조차 사치스러워 보일 만큼 이번 사태는 너무 지독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 앞에선 한일간의 해묵은 감정 따위는 생각할 것도 없이 나 역시 적지만 일본을 돕는 모금 운동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더구나 원전의 방사능 유출까지 겹쳐 사태 수습은 커녕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닿는 것 같아 정말 걱정입니다.  

또 하나의 놀라움은 일본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침착함입니다. 끔찍한 재난 앞에서조차 일본인들은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질서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악의 위기에 내몰렸음에도 약탈은 물론 사재기도 없고, 심지어는 차 한대 다니지 않는 피해 마을에서도 여전히 신호등까지 지키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전세계 언론은 일본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대해 감탄해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제 뉴스가 더 놀라웠습니다. 쓰나미로 완전히 쑥대밭이 된 한 마을의 동장이 생존자가 모여 있는 대피소 앞에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물도 먹을 것도 하나도 없다. 빨리 지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재난이 벌어진 지 며칠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기본적인 구호의 손길조차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일은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다른 재난 마을은 생존자들이 모포가 태부족이라 신문지를 덮고 추위를 견디고 있고, 어떤 마을은 하루에 주먹밥 한개가 먹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3일만에 처음으로 먹은 게 미소국 한 그릇 이었다는 마을도 있었습니다. 

 

일본에 파견된 우리 특파원들도 재난 지역에서 구호물자를 실은 트럭은 물론, 간간히 마주치는 119 구급대원외엔 구조에 나선 자원봉사자들을 한명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난 시스템이 가장 잘 갖춰졌다는 일본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 사태가 벌어진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일본 정부는 무엇을 하길래 가장 기본적인 물과 식량과 모포 지원조차 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일본인들이 극단의 상황에서 조차 유지하고 있는 침착함과 질서의식보다 난 이게 더 놀라웠습니다.  

마침 오늘 조선일보를 보니 이에 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모든 분야에서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사회고, 매뉴얼을 뛰어 넘는 상황에 대해선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는 게 기사의 요지입니다. 구호 활동이 더딘 것도 매뉴얼상 물자 배분보단 피해 상황 파악이 먼저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재민들은 지금 당장 굶주리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융통성 부족이 사태 해결의 어려움을 가져오고 있다고 이 기사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난 이 분석이 그간의 일본여행에서 얻은 경험에 비추어 일리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직장에 있을 때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로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앞당겨 귀국하게 될 일이 생겨서 가고시마에 있는 대한항공 지사에 들렀습니다. 이곳의 한국인 지사장에게 협조를 구하자 그는 일본인 직원에게 비행편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난 이 일이 10분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능한 대한항공편을 알아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 1시간이나 일본인 직원을 기다리며 지사장과 노닥거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항공 스케줄은 A4 용지로 가득 두장이나 되었습니다. 뭐가 이리 복잡한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가 원하는 대한항공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를 경유하는 대체 항공편까지 정말 몽땅 조사해왔습니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홍콩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편도 있었습니다.

일의 철저함은 놀라웠지만 이건 분명 비효율적인 업무 처리였습니다. 두 장이나 되는 스케줄표를 들어보이며 지사장을 쳐다보니 그도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도 정말 미치겠습니다. 이 친구들 일하는 게 항상 이렇습니다. 정확한 건 좋은데 늘 이렇게 융통성 없게 일을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런 간단한 일은 알아서 핵심만 딱 알아오면 좋을 텐데 참 답답하지요" 

역시 규슈의 후쿠오카 출장길에서 본 일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묵었던 호텔 바로 앞 도로에서 벌어진 재포장 공사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호텔 체크인 한 첫날 시작한 이 공사는 아스팔트를 뜯어내고 다시 포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간이 30m도 채 안되었기 때문에 난 넉넉히 2-3일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엇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공사는 늘 저녁 6시에 시작해 10시에 마쳤습니다. 왕복2차선의 좁은 도로인데다 퇴근 시간인지라 공사만 시작되면 양쪽 길이 모두 꽉 막혔습니다.

물론 클락션을 빵빵거리는 일본인들은 정말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갈 차례만 되길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난 이 공사가 끝난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열흘이나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루 4시간씩 정말 부지런히 일하는 건 분명한데 공사 진척은 정말 더뎠습니다. 우리의 대충대충 문화와 달리 꼼꼼하게 일하는 건 분명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난 왜 모든 시민들이 불편해 하는 퇴근 시간에 맞추어 공사를 하는 지, 사람이든 기계든 자원을 더 투입해 좀 더 빨리 공사를 끝낼 수는 없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교통정리원의 행동이었습니다. 공사 때문에 한 차선으로만 통행해야 했는데 교통 정리원은 정확히 10대씩 번갈아가며 통행시켰습니다. 한쪽 차선에 차가 없을 경우엔 다른 쪽 차선의 차를 좀 더 통행시킬 법도 하건만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쪽 차선이 텅비었음에도 교통정리원의 지시에 따라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는 운전자 중에서 따지고 드는 사람도 한명 없었습니다. 

그때의 일본인들과 지금의 일본인들은 참 닮았습니다. 
항의 한마디 없이 교통정리원의 지시에 따라 하염없이 대기하던 운전자들이 지금 군소리없이 줄서서 미소국을 받아드는 사람들이고, 일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던 대한항공 직원과 교통정리원은 지금 이 판국에 이재민 지원보단 피해 조사에 열중하고 있는 공무원들입니다.

경험상 난 일본인들은 권위에 굉장히 순종적이고, 권력 집행자들은 행동 지침에 충실히 따를 뿐 융통성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질서의식과 침착함도 난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난 이것이 권위에 대한 순종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상한 일이 벌어졌을 땐 비상한 대책이 필요한 데 일본의 권력 집행자인 정부와 공무원들은 여전히 낡은 매뉴얼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이런 안일한 대처는 권위에 순종적인 일본인들이 자초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난 지금 일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세계의 찬탄을 받는 침착함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아이티가 아닙니다. 이재민들에게 지원할 물자가 부족한 것도, 지원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전세계의 도움도 잔뜩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매뉴얼이 아직 안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대부분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일본의 이재민들은 주먹밥 하나로, 미소국 한그릇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지만 사지에서 겨우 벗어난 일본의 이재민들이 정부의 올바른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더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