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1. 5. 9. 06:00




참 많은 곳들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동안 세상에 아름답다는 곳과 위대하다는 유적들은 거의 다 돌아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놓은 여행의 기억들이 포화상태에 이른 것 같습니다. 여러 유적들의 건립연대가 혼동되고 다녀온 곳들의 지명도 헷갈릴 뿐만 아니라 내가 찍어온 사진을 놓고 여기가 어디였는지 고민하는 일이 잦아졌으니 말입니다. 수려하고 화려한 자연경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적인 경치에 도취되어 환호성을 내지른 기억은 생생한데 막상 그 경관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력이 감퇴해가는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선명하게 내 머리에 각인된 장소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 곳들은 대부분 무언가 부족한 듯 비어있는 황량한 공간들입니다. 빈 공간이 많은 장면일수록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기억되어진 것입니다. 예컨대 몽골의 고비사막이나 코카서스의 다비드 가레자 수도원 가는 길,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벌판, 시칠리아의 세리눈테, 볼리비아의 알티플라노 등이 그곳입니다. 

흔한 표현처럼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라거나 환상적인 경치라고 하는 곳들엔 여백이 없습니다. 화려하고 수려한 경관을 마주하고 서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내지르고 흥분되기는 하지만, 그 완벽함 때문에 내가 껴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난 철저한 구경꾼입니다. 빈 공간 없이 꽉 찬 완벽함, 그 도도함 앞에서는 말을 걸어볼 여지조차 없습니다.




반면에 텅 빈 공간을 마주하고 서면 내가 끼어들 여백이 마련되어 있어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그 여백에 내 시를 삽입할 수도 있고, 내 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발걸음은 사막으로, 들풀이 제멋대로 쓰러져 있는 스산한 벌판으로 자꾸만 향하게 됩니다. 

유적지도 그렇습니다. 완벽하게 원형을 이루고 있는 고대 유적지 보단 반쯤은 허물어진, 세월의 상처를 고스란히 받아낸 유적이 아름답습니다.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거나 빈틈없이 복원된 화려한 유적은 경이롭기는 하지만 마음속 깊은 감동은 적습니다. 세월이 흘렀으면 주름살도 깊이 패고 어딘가 생채기도 있어야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깔끔하게 정돈된 서유럽의 예쁘고 화려한 도시보다 칠이 벗겨지고 담장이 무너져 내린 코카서스의 뒷골목이 훨씬 더 살갑고, 위풍당당한 카테
드랄의 성모상보단 작은 마을의 동네 어귀 귀퉁이에 모셔진 성모상이 더 정겹게 다가섭니다.

처음엔 화려한 풍광을 찾아 나서고, 의미있는 유적을 쫓아다니다가 여행의 깊은 맛을 알아갈수록 점점 더 황량한 벌판과 사막으로 눈길이 향하는 것은 여행매니아들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투박한 오지여행이나 사막, 다소 쓸쓸한 길을 찾아가는 여행상품이 나오면 여지없이 매니아들이 몰려드니 말입니다.

나는 지금 시칠리아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난 ‘비어있는 게 아름다운 것이며, 비어있을수록 자유로움도 커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행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