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악의 범죄 현장 아우슈비츠. 폴란드에선 오시비엥침이라 부르는 이곳을 처음 봤을 땐 그냥 평범한 전원마을 같았습니다. 푸른 잔디와 커다란 나무들, 그리고 붉은 지붕을 한 집들이 폴란드의 여느 마을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그냥 그렇게 흐르는가 봅니다. 불과 60여년전, 매캐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을 아우슈비츠. 그래서 아무도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이 비극의 현장은 지금 역사를 배우려는 사람과 이런 역사에 무심한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연중 북적거리는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






'전원마을 같다'는 생뚱맞음에 분명한 첫인상도 출입문의 표어를 보면서 싹 사라졌습니다. 독일어로 표기된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외에 이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우슈비츠내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입니다. 수용자들은 이 문을 드나들며 무지막지한 중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노동력이 없는 어린이나 노약자들은 수용 즉시,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아우슈비츠엔 28동의 수용막사가 있습니다. 많을 땐 2만8천명을 동시에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끔찍하지 않은 막사가 없겠지만 이 중에서도 맨위의 오른쪽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동에서 가장 잔악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원래 폴란드의 정치범 수용소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35년 독일에서 시행된 뉘른베르크 법이 발단이 되어 결국 아우슈비츠는 인류사에 결코 씻지 못할 대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태인의 혈통이 섞인 국민을 독일인과 구분한다는 것을 그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독일 영토를 떠나 해외로 이주할 것이 종용되었습니다. 하
지만 미국과 유럽 각 국 또한 유태인들의 대량 이민을 받아들일 의사가 당연히 없었으므로 독일의 유태인들은 점차 나치스 정부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1939년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유태인들은 모든 공공시설 사용과 경제 활동이 금지되었고, 가슴에 '다윗의 별'이라는 배지를 달아야 했습니다. 1941년부터는 12세 이상의 유태인 남자들은 군수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해야했고, 1942년 1월 20일 소위 '유태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이 논의된 직후부터 본격적인 아우슈비츠 수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4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우슈비츠에선 최소 150만명에서 최대 400만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최소 150만명으로 잡았을 때 하루 평균 113명이 매일 죽어나간 셈입니다. 아우슈비츠 인근의 비르케나우에 있는 제2의 아우슈비츠에서도 비슷한 숫자가 학살당했으니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사실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는 독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유태인들은 상이한 문화와 종교 때문에 유럽 각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독일이 유태인들의 해외이주를 강요했을 때 이를 받아주는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독일내의 유태인들은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처지였던 것입니다.

독일에서 유태인들에게 '다윗의 별'을 달게 했을 때 이 방침은 독일 뿐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독일 뿐 아니라 여타 유럽국가들에서도 유태인들에 대한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타 유럽 국가들도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없다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집단으로 교수형에 처하던 곳입니다.


여타 유럽국가들이 민족간의 갈등이었던 반면 나치 독일은 국가가 이를 제도화한게 큰 문제였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는 독일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정치적으로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유태인을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악덕 자본가로 몰아세운 히틀러의 이 주장이 독일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나치스당도 독일에서 확고한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히틀러는 유태인 차별을 통해 국가의 단결을 도모하고, 
나치스당이 정말로 독일을 바꾸어 놓고 있다는 대중 심리적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도무지 믿기지 않는 집단 광기로 몰아 갔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가장 잔악한 일이 벌어진 곳이 바로 이 장소입니다. 왼쪽의 10동에선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이 벌어졌습니다. 오른쪽의 11동에선 수용자들을 굶겨 죽인 '기아실'과
좁은 방에 사람을 가득 몰아 넣어 선 채로 꼼짝도 못하게 하는 '서있는 감옥'이 있었습니다. 두 동 사이의 회색 벽은 총살을 하던 '죽음의 벽'으로 늘 방문객들의 조화가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건 유태인 뿐이 아닙니다. 저 위 지도의 아우슈비츠와 연결된 모든 곳에서 유태인은 물론 공산주의자, 반 나치주의자, 동성애자, 집시등이 끌려와 학살을 당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28개 민족으로 유럽 거의 모든 나라입니다.

유태인들은 나중에 이스라엘과 미국계 유태인이 중심이 되어 배상과 사과라도 받아냈지만 나머지 희생자들은 고스란히 잊혀져 버렸습니다. 이곳의 희생자가 누구인지도,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도, 무슨 이유로 이곳까지 끌려와 죽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관심 갖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이렇게 끌려온 노인과 대부분의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은 노동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즉시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수용자들의 숙소입니다. 저곳에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히 누워 잠을 자야 했습니다.





 

식사는 365일 똑같은 죽 뿐이었습니다.











다치거나 아파도 즉시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산다는 것은 단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뿐이었습니다.






가스실 내부는 정말 음침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치클론 B> 라는 가스입니다.











희생자들의 사진입니다. 어차피 이렇게 죽일거 나치들은 왜 수용자들의 증명사진을 찍어놨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입니다. 이 머리카락으로 카펫을 짰습니다.






압수된 안경들입니다. 눈이 나쁜 것도 가스실 행의 이유였습니다.







누구의 가방일까요?






누구의 빗과 솔일까요?






 




누구의 신발일까요?






이 인형은 어떤 소녀의 것이었을까요?






극소수의 생존자들이 있었지만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얼마나 잔악할 수 있으며, 인간이 얼마나 쉽게 집단적인 광기에 빠져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뼈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학살극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역사를 알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함입니다. 아우슈비츠에 있는 문구 하나를 옮기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역사를 기억하라. 그렇지 않으면 또 반복될 것이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