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 아가멤논의 왕국 미케네. 코린트를 떠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시간여 달려 이 전설의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미케네 성채로 들어가기 앞서 초입에 있는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를 먼저 찾았습니다.







발굴 당시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는 텅비어 있었습니다. 이미 도굴되었던 것입니다. 미케네의 역사는 대략 따져도 3500여 년 입니다. 참 긴 세월입니다. 창고에 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것입니다.







보물은 없어도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는 3500년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한 놀라운 건축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 입구와 비슷해 보이는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는 우선 돌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게 건축 전문가들의 얘기입니다. 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삼각형 구조를 사용하거나 안쪽의 천장을 돔처럼 원형으로 만든 건 청동기 시대의 건축술로는 놀라운 경지라는 평입니다. 


 




한 문명의 개괄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데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게 최고입니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1876년 발굴에 성공할 때까지 미케네의 존재는 전설일 뿐이었습니다. 사실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와 미케네의 이야기는 인간과 신들의 이야기가 뒤범벅되어 있어서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슐레이만이 트로이에 이어 미케네까지 발굴에 성공함으로써 신화가 일약 역사적인 실재로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미케네의 항아리가 트로이 유적에서 발굴됨으로써 트로이의 존재와 위치가 확정되는, 결정적인 물증이 되었습니다.

또 한 슐레이만의 미케네 발굴은 트로이-크레타-미케네의 순서로 에게 문명을 이루고, 이것이 결국 그리스 문명을 이루었다는 단계적 발달사를 확인함으로써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미케네의 근거지인 미케네 성터로 향했습니다.

미케네는 청동기 말기인 기원전 1700-1100년 사이에 존재했고, 1500년대에는 크레타 대신 지중해 해상무역권을 독점하며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고, 기원전 14세기에서 13세기에는 전성기를 맞아 많은 지역에 식민지를 두었습니다. 







미케네의 상징은 바로 이 사자문입니다. 3m에 달하는 육중한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사자 두마리가 서로 마주보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성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미케네 성은 높이 2m가 넘는 큰 돌을 정교하게 쌓아 만든 벽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성벽이 두꺼운 곳은 14m에 달하는 매우 견고한 성채입니다.












사자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커다란 원형 분묘가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아가멤논 왕의 황금 마스크'가 발견되었습니다. 황금 마스크는 지금으로치면 수의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황금마스크가 뱔견됨으로써 아가멤논이 전설이 아닌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사자문에서 성채까지는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합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구조를 보면 확연히 다릅니다.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은 사방이 온통 평평한 평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케네 성채는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바로 나중 그리스의 폴리스마다 반드시 있게 되는 아크로폴리스의 원형이 미케네의 성채인 것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땅덩어리가 작은 크레타에 비해 그리스 본토는 경쟁 상대가 곳곳에 산재해 무엇보다 방어의 개념이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궁전이 있던 자리로 추측되는 곳입니다. 크기로 보아 궁전 자체는 큰 규모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해를 운항하는 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을 가진 명당 자리입니다.







워낙 오래된 도시인지라 성채는 복원 작업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제외하곤 온전한 것이 드뭅니다.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벌어졌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맹주는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이었습니다. 훗날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스파르타는 아가멤논의 동생인 메넬라오스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때만해도 힘이 보잘 것 없었습니다.

전쟁의 발단은 스파르타를 방문한 트로이의 왕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인 헬레네를 데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지금으로치면 한 국가의 정상이 다른 나라를 방문했다가 그 나라의 퍼스트레이디와 눈이 맞아 몰래 데리고 갔다는 것이니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당시엔 이런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어쨋든 자존심이 상한 메넬라오스는 형에게 달려갔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조직해 드디어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당시 세계 최강은 철기로 너무나 유명한 히타이트였습니다. 문제는 히타이트가 트로이의 후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타이트는 세력이 점차 약화되어 가는 시점이었고, 마침 신흥세력인 앗시리아와 전쟁중이었습니다.  아가멤논은 그래서 히타이트가 참전하지 못할 것이란 계산을 하고 트로이와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아가멤논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히타이트가 없는 트로이도 쉽사리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전개과정은 복잡합니다. 무려 10년간이나 승패가 나지 않은 장기전이었으니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입니다.

과정은 생략하고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가 나오는 결말을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 목마'라는 아가멤논의 기막힌 전략으로 그리스가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트로이 목마'라는 극적인 플롯이 없었더라면 트로이 전쟁이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트로이 목마'야 말로 전설일 뿐 사실이 아닐 것으로 보는 게 역사계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우선 그리스 연합군과 무려 10년이나 용호상박의 전쟁을 치룬 트로이가 바보일리가 없습니다. 군사를 잔뜩 숨긴 목마를 아무 의심없이, 아무 검사없이, 아무 확인없이 덥썩 성안으로 들였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대신 트로이의 함락은 갑작스럽게 닥친 대지진 때문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실제로 트로이의 유적터에선 대지진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포세이돈은 지진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암튼 갑작스런 대지진으로 성이 허물어지고 혼란스런 틈을 타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만든 후 올리브 나무가 울창한 아르고스 평야가 펼쳐진 미케네 성채로 개선했습니다.

하지만 아가멤논의 최후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가멤논은 전쟁 출정 전에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딸을 죽였습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왕비가 남편이 개선하자마자 사촌형제와 공모해 아가멤논을 죽였고, 왕비는 나중에 아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 비극적인 근친살인의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