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2. 2. 20. 06:00



내가 처음으로 고사목을 본 것은 지리산 제석봉에서입니다. 30여 년 전 겨울, 눈밭을 헤치며 천왕봉을 오르다가 짙은 안개 속에 서있는 고사목 군락을 만났습니다.

그 땐 거센 눈보라 속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서있는 고사목들이 처연하고 서글픈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형편없이 말라비틀어진 몸뚱이로 거센 칼바람에 맞서고 있는 그들은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슬픈 운명들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이후 여행지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고사목들 또한 느낌은 비슷했습니다. 쓸쓸하고 적막하고 허망해 보이고… 특히 황량한 벌판에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서있는 고사목들은 길고 긴 세월 동안 가슴에 쌓인 회한을 품고 있는 듯하여 말이라도 붙이면 울컥 설움 한 덩어리를 토해낼 것만 같았습니다.

확실히 고사목은 그 자체로써 쓸쓸했습니다. 고사목을 보면 본능적으로 쓸쓸함이 느껴져 카메라를 들이댈 때도 어떻게 하면 그 느낌을 좀 더 강조해서 담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언제부턴가 고사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내 눈에 보이는 고사목에서는 여유와 의연함이 느껴집니다. 완전한 자유가 느껴집니다. 고사목들은 더 이상 온몸에 달라붙어 흔들거리는 이파리들의 아우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그러다가 낙엽이 되어 홀연히 떠나가는 이별의 슬픔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제 살을 뚫고 새롭게 이파리를 피워내야 하는 산고(産苦) 또한 없을 것입니다.

긴 세월 동안 떠안았던 수고와 짐, 이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야 완전한 자유가 되어 우뚝 서있는 고사목들, 오랜 풍파에도 썩어 넘어지지 않고 더욱 단단하게 세월을 버텨낸 그들에게선 당당함마저 느껴집니다.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여행하다보니 예전의 모습과 자꾸 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리곤 입버릇처럼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산업화되고 기상이변이 일어나도 본질은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변한다 해도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와트일 뿐이고 인도는 인도일뿐입니다. 오히려 변한 건 내 눈이고 내 감정이고 내 판단입니다. 그래서 갔던 곳을 반복해서 가고 또 가도 지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0년후 쯤 내 눈에 보이는 고사목은 어떤 느낌일까요?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