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0. 11. 8. 07:00


흔히 가장 설움을 많이 받은 민족을 꼽으라면 유태인들을 말합니다. 나라 없는 설움을 안고 유랑생활을 했던 2.000년의 역사, 그리고 홀로코스트로 대변되는 나치에 의한 대학살 등이 그런 이미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민족에 비하면 유태인들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유태인들은 말이 유랑생활이지 어느 곳에서나 막대한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니 나라가 없을 뿐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르메니아의 역사는 정말 기구했습니다. 역사상 이름 꽤나 알려졌다고 하는 제국들은 예외 없이 아르메니아를 밟고 지나갔습니다. 메디아 왕국을 필두로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 비잔틴 제국, 셀주크투르크, 몽골, 사산조 페르시아, 오스만 투르크, 러시아 등이 그들입니다. 그야말로 강대국들의 동네북이었던 셈입니다. 이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낀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격돌하는 충돌지역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나 외부의 침략, 학살 등에 대해서는 이미 이골이 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지만 1905년 터키에 의해 자행된 인종청소는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절대 씻을 수 없는 한을 만들어 놓은 듯합니다.

지금은 터키 땅이 되어버린 아나톨리아 지방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약 300만 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아스톨리아 지방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노아의 방주 흔적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아라라트 산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터키는 아스톨리아 지방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몰아낼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리고 택한 방법이 몰아내기보다는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강제이주를 명분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사막으로 내몰았습니다. 일단 사막으로 내몰린 대규모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사막을 벗어나 인근 국가로 들어갈 방법도 없었습니다. 강대국 터키의 압력에 의해 인근 국가 그 누구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막에서 방황을 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굶주림속에 죽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공식적으로는 150만명, 아르메니아 주장으로는 무려 200만 명 입니다.  

상식적으로 이정도의 사람이 학살당했다면 국제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텐데, 분하게도 이 사실은 철저히 왜곡되고 숨겨져 왔을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터키제국의 눈치를 보는 측면도 있었고, 인근 국가들은 공범이라는 생각도 들었을테고, 서방국가들에겐 제대로된 정보가 전달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극비리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학살이었습니다. 또한 이 학살 이후 아르메니아가 소련연방으로 편입되면서 소련 정부가 이 일을 들춰내는 것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슬픈 역사를 가진 아르메니아지만 여행 중에 만난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정말 다정다감하고 따듯했습니다.
볼거리 또한 너무나 많아서 여행 기간 내내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아흐파트와 사나힌 수도원, 세반호수에 자리잡은 세반느반크 수도원, 게르하드 수도원과 세계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가 있는 가르니 계곡 트레킹 등.... 여행기간 내내 가이드 ‘아라’씨는 열정적으로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세심하게 우리들을 챙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날, 귀국에 앞서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관을 찾아가고 싶다는 말에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외국인들은 대개 이 학살추모관 방문을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교사절이나 외국의 국가원수들에게 이곳은 터부시되는 장소입니다. 학살추모관 방문은 곧 터키와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터키땅이 되어버린 아라라트 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학살추모관 앞에는 이곳을 방문한 외국명사들이 심은 나무들이 쭉 늘어서 있었습니다. 누가 이곳을 방문했는지 유심히 팻말을 살펴보았는데, 국가원수급은 단 한명도 없었고 국회의장이나 차관급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마도 국가원수급의 인사가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외교적인 부담이 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다만 올 8월에 러시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이곳을 찾아 헌화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코카서스 3국 중 반러시아 노선을 걷고 있는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에 비해 아르메니아만은 친러시아 노선을 표방하기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아르메니아를 잘 관리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해마다 8월 19일이 되면 이곳은 거대한 꽃동산으로 변해버린다고 합니다. 아르메니아의 공식적인 대학살 추도일이기 때문인데, 이 날이 되면 거의 모든 국민들이 꽃을 들고 찾아 옵니다. 100만 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다면 아르메니아 전 국민의 30% 이상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니 아르메니아 사람들 대부분이 학살 피해자의 가족들인 셈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한과 설움을 안고 산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가이드 ‘아라’씨의 경우만 보더라도 할아버지와 삼촌이 학살당한 피해자였습니다.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아라’
씨는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바라지 않습니다. 또한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세계가 알아만 주어도 좋겠습니다’
조용하지만 절규처럼 들리는 그의 말 속엔 아르메니아의 설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듯해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