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1. 1. 13. 06:00




지난해 크리스마스날 출발한 남미여행이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새 해가 바뀌어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반응할 새가 없는 하루하루입니다. 여행 중엔 공간만 존재할 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10년의 마지막 날은 파타고니아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서 보냈습니다. 보트를 타고 빙하 가까이 접근해 보기도 하고, 빙하 코앞에 있는 전망대 테라스에서 2시간 남짓 자유시간을 가지며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습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그동안 여러번 보아왔지만 항상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동에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이 일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그 감회가 색달랐습니다. 장엄한 빙하 앞에 서니 감탄이나 흥분에 앞서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왠지 우울해지더군요.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월의 무상함'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꽉 메워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꼭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이따금씩 굉음을 내며 빙하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었는데, 이날은 너무나 자주, 또 너무나 큰 덩어리들이 쉴 새 없이 내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관광객들 틈에 끼어 혼자 우울하게 있는 것이 조금 뻘쭘하긴 했지만 묘하게도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 만년을 버텨온 세월이 일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입니다. 빙하가 무너지며 내는 천둥치는 소리는 빙하의 비명소리처럼 들렸고 호수로 쏟아져 내리는 얼음덩어리들은 절망의 몸짓 같았습니다.
그 위풍당당하고 장엄했던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원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지만 각국에서 모인 여행자들은 환호성으로 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저 거대한 빙하가 모두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입니다. 다행히도(?) 향후 30년은 더 버틸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라고 하니 그나마 위안거리로 삼아야 할까요?

정성스레 빙하사진을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어쩌면 내 손주가 이 사진을 보며 '할아버지 시절에는 지구상에 이런데도 있었네?'라고 신기하게 볼 지도 모를 일입니다.




새해 첫날에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트레킹을 나갔습니다. 가벼운 트레킹 코스로는 가히 세계최고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아무리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암봉들, 게다가 설산을 머금은 옥빛 호수들이 어우러지는 산책로를 걷는 기분은 에덴동산의 아담이라도 이보다 행복할 순 없을 것입니다. 지구는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트레킹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하지만 내 콧노래는 나스카에 이르러 다시 멈추고 말았습니다. 페루의 남부 사막에 그어진 불가사의한 지상그림들, 천 년의 세월 동안 대지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던 그 그림들이 예전보다 흐릿해졌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습니다. 나스카의 지상그림들이 그 오랜세월을 버텼던 이유는 연간 강우량 '0'라는 메마른 기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비가 조금씩 내리면서 그림도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날 밤에도 나스카의 대지에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렸습니다. 적어도 나스카 지역에 이런 비가 내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뇨 현상에 의한 기상이변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병들어도 정말 단단히 병든 것 같습니다.




오늘 낮에는 마야문명을 돌아보았고, 멕시코의 인류학 박물관에서 마야인의 '태양의 돌'을 만났습니다. 현대인의 과학을 능가하는 천문학 기술을 보유했던 마야인들은 2012년 12월 22일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종말을 막고자 끊임없이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신전에 인신공양을 했던 마야인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지구상에서 모두 종적을 감춰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오늘밤에도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쉴 새 없이 녹아내릴 것이고, 나스카의 메마른 땅엔 또 비가 쏟아질지도 모릅니다. 지구촌의 기상이변은 더 이상 이변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환경 파괴의 끝은 어디일까요? 그리고 마침내 지구는 어느 시간에 멈추게 될까요? 오늘 본 마야인의 '태양의 돌'과 묘한 매치를 이루면서 왠지 몸이 으스스해 집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호텔방에 비치된 시계는 쉴 새 없이 시간을 더해만 갑니다. 2012년 12월 22일을 향해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