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 리포트2010. 11. 6. 12:07



당장이라도 버스를 세우고 걷고 싶었습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대지를 덮은 누런 풀들이 몸을 부대끼며 아우성치는 땅, 부드럽게 이어지는 포근한 능선 사이로 한줄기 가느다란 길이 나 있었습니다. 


그루지야의 다비드 가레자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이처럼 참으로 쓸쓸하고 황량했습니다. 오래전, 세상을 등지고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도자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요? 어느새 처음 이 길을 만났을 때의 흥분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고요한 심연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다비드 가레자 수도원은 여행자들의 수선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침묵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렇게 1600년의 세월을 버텨온 듯 합니다. 
 

수도원 뒤편의 산으로 트레킹에 나섰습니다. 누렇게 탈색된 엉겅퀴와 갈대 사이사이에는 말라버린 꽃들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정상을 넘어서자 차마고도의 마방길을 연상시키는 아스라한 절벽길이 나왔습니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수도사들의 암굴이 가없는 대지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여행을 다닐 만큼 다녔건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대지가 숨을 쉬고 있는 느낌, 침묵을 강요하는 듯한 그 느낌에 사진 찍을 생각도 잊고 말았습니다.
 

코카서스에서의 특별한 느낌은 현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루지야 군용도로를 타고 가서 만난 게르게티 삼위일체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프차를 타고 한참동안 답답한 숲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앞이 탁 트이는가 싶더니 천상의 집인 듯 고고하게 서있는 언덕 위의 성당이 거짓말처럼 나타났습니다.

멀리 카즈벡산의 설봉을 배경으로 서있는 이 자그마한 건물은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 자리에 서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이었습니다. 아니,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그곳에 그대로 있어줘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성당까지 오르는 길 한걸음 한걸음이 아까워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발길을 옮겼습니다. 때마침 불어오는 거센 칼바람마저도 이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그리고 성당 내에 들어서는 순간, 침침한 작은 공간이 너무나 포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이곳에 가면 모든 시름을 덜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르메니아로 넘어와서도 사나힌 수도원, 세반느반크 수도원 등의 고즈넉함에 반해 버린 우리 일행들은 가르니계곡 트레킹에서 또 한 번의 절정감을 맞이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주상절리 지역을 통과하는 트레킹 구간 내내 당장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은 육각형의 돌기둥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트레킹 말미에 파간사원으로 올라가는 길도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길가에 탐스럽게 익은 포도를 몇 송이 따서 입에 물고 다니던 중 누군가가 산딸기를 한웅큼 따서 손에 건네주었습니다. 또한 바닥에 떨어진 호도를 깨먹는 재미에 오르막이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모두가 코카서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추모관을 찾았습니다. 1915년, 터키에 의해 자행된 인종청소로 인해 2-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엄청난 학살극에 대해 주변의 모든 국가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외면했고, 이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조차 터부시해왔습니다.
 

학살추모관은 아르메니아인의 성지이지만 지금은 터키땅이 돼버린 아라라트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꺼지지 않는 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서 서로 손을 맞잡았습니다. 순박하기만 하던 현지가이드 ‘아라’씨는 이곳에서만큼은 말이 없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추모하느냐는 질문에 아라씨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더니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라라트산이여 그대는 알고 있겠지.
 세상 모두가 모른척해도,
 아무도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아도
 
아라라트산이여 그대는 알고 있겠지.
 
우리가 살고 있음을,
 우리 서로가 사랑했음을,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내 손을 잡고 있던 아라씨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률이 고조됨에 따라 그 떨림은 격정적인 파도가 되어 내 가슴에 전해졌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슬픔을, 코카서스, 그 아름다운 땅의 서러움을… 그리고 이 순간에 묘하게도 다비드 가레자에서 봤던 대지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게르게티 삼위일체 성당의 위엄 있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코카서스에는 가슴을 후벼 파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