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옹성이란 아마 크락데슈발리에를 두고 만들어진 말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성은 단 한번도 함락되어 본적이 없습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을 지켜내 '이슬람의 수호자'로 칭송받는 살라딘 조차 크락데슈발리에를 보고선 불가능함을 깨닫고 바로 다음날 철군해버렸습니다.

그런 역사가 아니더라도 해발 750m의 칼릴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크락데슈발리에는 어느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정말 위풍당당합니다. 


크락데슈발리에는 아랍어로 '기사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1096년에 시작한 십자군 원정은 사실 유럽의 국가들에겐 무리한 전쟁이었습니다. 설혹 예루살렘을 탈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오랫동안 지켜낼 군사력이 없었으니 처음부터 패전이 불가피한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십자군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던 1차 십자군 전쟁 당시 군사 수는 대략 1만5천여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 인원이 십자군 원정의 베이스캠프인 터키 남부의 안디옥(지금의 안타키아)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700km가 훨씬 넘는 구간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하고 나선 수많은 기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예루살렘 조차 300여명의 십자군이 고작이었습니다.
이런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십자군은 700km 구간의 요소요소에 크락데슈발리에 같은 견고한 십자군성을 50여개나 세웠습니다. 이슬람의 반격에 50여개의 십자군 성들은 하나하나 함락되어 파괴되었지만 유독 크락데슈발리에 만큼은 끝까지 난공불락이었습니다.




크락데슈발리에 성채에선 모든 것이 아래로 한꺼번에 다 보입니다. 어떠한 군사 이동도 이곳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크락데슈발리에는 이슬람의 요충도시인 홈스와 지중해를 잇는 너무너무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한 이슬람 역사가는 "크락데슈발리에는 이슬람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크락데슈발리에의 견고성은 이중구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크락데슈발리에는 13개의 감시탑이 있는 외성과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습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 부분을 45도 각도의 경사면으로 만들어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 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1271년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가 수많은 희생끝에 외성을 뚫는 데는 성공했으나 내성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성채 내부엔
바닥이 꺼지면서 적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 몇 년을 공급할 수 있는 식량을 비축했던 곡식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방의 길이가 120m에 달하는 대 집회소, 예배소, 식당, 숙소, 미로와 같은 비밀 통로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도저히 함락시킬 수 없었던 이집트 술탄 베이발스는 한가지 묘안을 짜냅니다. 성안의 십자군들에게 유럽으로 철군하라는 십자군 총사령관의 명이 담긴 밀서를 보낸 것입니다. 물론 가짜였습니다. 십자군들은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투항한 다음 성을 버리고 유럽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덕에 크락데슈발리에는 조금의 손상도 없이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이 잘 된 십자군성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크락데슈발리에의 함락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가장 견고했던 크락데슈발리에가 이슬람 수중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십자군 성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습니다. 결국 20년후인 1291년 마지막 남은 아코 성채까지 이슬람 손에 들어갔으니 크락데슈발리에의 함락은 사실상 십자군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유럽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