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파리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첫 유럽 여행일 수록 그렇습니다. 특히 런던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넘어올 경우 더 심합니다.
실망 원인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지저분하고, 공원에 가면 똥오줌 냄새가 나기도 하고, 사람들은 신호 무시하고 거리 건너기 일쑤여서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도 이 경우에 속합니다. 거리에서 휴지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런던은 보기는 좋을 지 몰라도 살기에는 오히려 숨막힐 것이란 생각입니다.

파리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내 생각과 비슷했습니다. 
"어느 정도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는게 사람사는 세상 아닌가? 그리고 신호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건 차가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모두 이런 생각때문인지 사람이 그냥 길을 건너도 차들은 빵빵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사람이 지나가길 잘도 기다려 줍니다.

아마 그래서 파리는 '영원한 자유의 도시'이고 '예술의 도시'라 불리는 모양입니다.






에펠탑과 함께 개선문은 파리의 상징입니다. 개선문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아주 멋진 전망대가 그 위에 있습니다. 물론 아무나 걸어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보면 동서쪽으로 대로가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끝은 프랑스가 만든 미래형 계획도시인 라데팡스입니다. 길 끝에 가운데가 텅 빈 흰 사각형 건물이 보이는 데 신개선문입니다.






라데팡스의 신 개선문 꼭대기에서 본 모습입니다. 길 끝에 구 개선문이 보입니다. 신구 개선문이 서로 마주 보도록 도시가 설계되어 있습니다.









라데팡스엔 같은 모양의 건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라데팡스는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아까 멀리 보였던 신 개선문입니다. 가로 세로가 모두 정확히 105m인 정사각형 입니다. 문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공간은 모두 사무실입니다. 거리와 거리를 구 개선문과 신 개선문으로 연결하는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다시 개선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름 그대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기 위한 기념물인데 1806년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 착공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유럽 정복길에 돌아오는 자신의 개선을 위해 이 기념물을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배를 떠나면서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후에 관속에 든 시신으로 이곳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위 사진의 개선문 꼭대기를 자세히 보면 점점이 보이는 데 모두 전망보러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다시 개선문 꼭대기에서 이번엔 라데팡스 반대쪽, 즉 동남쪽으로 보면 또 멋진 대로가 쭉 뻗어 있습니다. 화려한 쇼핑의 대명사인 샹제리제 거리가 양 옆으로 있고, 길 끝엔 콩코드 광장이 있습니다.
샹제리제 쇼핑가의 임대료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 어떤 곳도 임대료를 내고 나면 남는 장사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손해가 뻔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브랜드가 이곳에 앞다투어 매장을 내는 이유는 단지 홍보와 고급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라니 대단한 쇼핑거리임에 분명합니다.





프랑스 특유의 사각 머리를 한 조경수 사이로 콩코드 광장의 상징인 뾰족한 오벨리스크가 보입니다.





콩코드 광장은 파리지엥들은 물론 수많은 여행자들이 피곤한 발걸음을 쉬어가는 쉼터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엔 이곳이 파리에서 가장 살벌한 장소였습니다. 바로 단두대가 설치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루이16세도,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철딱서니 없는 명언(?)을 남겼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곳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당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 형을 받은 사람은 1,343명에 달합니다.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직접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무려 3,200년이나 된 오벨리스크 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커다란 궤종시계와 바꾸었다고 하는 데 시계는 1년도 못 가 고장났다고 하니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약탈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서로 선물을 교환한 형식을 취한 모양인데 이집트는 저 오벨리스크의 반환을 프랑스에 요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느강이고, 파라에 오면 누구나 한번쯤은 타게 되는 유람선입니다. 유람선 오른쪽으로는 세느강이 만들어 낸 시테섬이 조금 보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틀담의 꼽추'로 너무나 잘 알려진 노틀담 성당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양식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루이7세때인 1163년 건축을 시작, 완공까지 무려 170여년이 걸린 대작입니다.


















노틀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일 것입니다. 특히 남쪽에 나 있는 둥근 장미창이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웅장한 성당 내부입니다.
지금은 프랑스인들과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성당이지만 한 때는 프랑스 국민들의 미움의, 아니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가 왕권보다 더 강하던 중세 시절, 노틀담은 막강한 교권을 내세워 온갖 치부와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증오심을 불태우던 프랑스 국민들은 대혁명후 노틀담의 사제들을 단두대로 처형시켜 버렸습니다. 콩코드 광장에서 죽어간 1,343명 중엔 이곳의 사제들도 포함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게 무엇이 되든 지나침은 늘 화를 불러 온다는 것을 역사는 자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틀담 성당 앞 광장엔 별 표시가 되어 있는 제로 포인트가 있습니다. 만약 '파리에서 100km 떨어져 있다'라고 하면 바로 이곳을 시작점으로 잰 것입니다. 즉, 노틀담 성당 광장이 파리의 정중앙이라는 뜻입니다.





파리의 중심을 흐르는 세느강엔 수많은 다리가 있는데 사진은 그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는 알렉상드르 3세교 입니다. 뒷편으로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보입니다.






세느강 유람선에서 본 에펠탑입니다.

에펠탑이 파리의 상징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원래 에펠탑은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위한 기념물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은 만들 당시부터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 괴물'이라며 엄청난 혹평을 받았습니다. 단지 박람회가 끝나는대로 철거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당시 파리 시민들이 참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람회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바람에 파리 재정이 바닥나 버린 것입니다. 에펠탑을 철거할 비용이 없게된 것입니다. 돈을 마련하지 못한 파리시는 철거를 차일피일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자의 일생'으로 너무나 유명한 작가 모파상이 에펠탑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자주했는데 그 이유가 "파리에서 에펠탑이 안보이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말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렇듯 파리시민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에펠탑이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파리의 상징이 되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아이콘이 되었으니 정말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파리에 어둠이 내리면서 세느강변도 붉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밤의 세느강 유람선은 수만개의 전구가 불을 밝히는 에펠탑등 온 도시에 조명이 켜지면서 낮에 보는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풍경을 선사합니다.

봐도 봐도 볼 곳이 나오는 화수분같은 도시인 파리는 3편으로 나누어 블로깅하는데 두번째 편은 건축물과 명소들을 중심으로, 세번째 편은 파리지엥의 휴식과 문화를 중심으로가 계속됩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