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시간 반 거리의 아담한 도시 루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으니 적어도 2천년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역사가 이러니 루앙에서 온갖 일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루앙이 역사에 본격 등장한 것은 10세기 경입니다. 프랑스의 북부해안을 노르망디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북방에서 내려온 노르만족은 자주 프랑스 해안마을을 약탈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바이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노르만족입니다. 이들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프랑스의 샤를3세는 세느강변의 항구 도시 루앙을 하사하여 정착하게 했습니다.

노르망디 공으로 봉해진 이들의 수장 롤로는 루앙을 수도로 노르망디 공국을 건설하고 독립국을 이루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수많은 바이킹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특히 중세 무렵 인구는 곧 국력이었습니다. 루앙 인근에 정착한 이들 노르만인들이 결국엔 프랑스의 강대함에 크게 공헌을 하게 된 셈입니다. 






루앙의 랜드마크인 대시계입니다. 14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바늘이 하나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거리를 대시계거리라고 하고, 수많은 반목조가옥들과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는 루앙 최대의 번화가입니다.

노르망디공국의 가장 위대한 왕은 윌리엄1세(정복왕 윌리엄)일 것입니다. 루앙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윌리엄1세는 1066년 마침내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왕에 올라 노르만 왕조를 열었으니 본격적인 영국을 만든 것은 루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1338년부터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100년 전쟁의 씨앗이 되었으니 역사의 큰 물줄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참으로 예측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루앙이 유명해진 또 하나의 이유는 잔 다르크 입니다. 종교재판에 몰려 처형당한 곳이 바로 이곳 루앙이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가 화형된 마르세 광장엔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면서 프랑스 안에 영국땅이 있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 양국은 영토 소유권을 두고 잦은 충돌을 빚어 왔습니다. 약 300여년간의 마찰이 마침내 화산 터지듯 한꺼번에 폭발한 게 100년 전쟁입니다.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이 노르망디에 대규모 군사를 주둔시킨 것을 발단으로 시작된 100년 전쟁은 시작부터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노르망디가 있는 북프랑스가 곧바로 초토화되었고, 한때는 프랑스 국토 대부분을 영국이 차지함으로써 프랑스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 때 홀연히 나타나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당시 17세 소녀 잔 다르크 입니다.  






100년 전쟁과 잔 다르크의 활약상은 복잡하니 생략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던져줍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 처럼 잔 다르크는 마녀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구한 프랑스의 배반으로 영국군 손에 넘겨 졌으니 그녀의 죽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잔 다르크의 죽음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선 프랑스 입장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졸지에 승리를 목전에 둔 프랑스로선 잔 다르크의 존재가 이젠 엄청난 부담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전쟁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이미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졌기 때문에 잔 다르크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위치였습니다. 프랑스내의 쟁쟁한 귀족들은 물론 왕 조차도 잔 다르크의 명성 앞엔 그저 평범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이게 지배층으로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거에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제거는 불가능했습니다. 민심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적인 영국의 손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게 은밀하게 잔 다르크를 넘겨준 이유입니다.

영국으로선 무엇보다 패배의 원인이 중요했습니다. 다 이겨 놓은 전쟁을 일개 소녀 때문에 졌다는 것은 왕조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영국이 집요하게 고문을 가하면서 마녀로 몰아간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악마의 도움을 받은 마녀 때문에 전쟁에 졌다는 건 당시로선 충분히 받아들여질만 한 사유였습니다. 

암튼 이렇게 서로 100년간이나 철천지원수처럼 싸웠던 두 나라간에 잔 다르크의 죽음에 관해선 공모가 이루어졌으니 역사는 참으로 잔인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녀의 나이 19살때였습니다. 

잔 다르크 기념교회는 일반적인 교회 건축물과 달리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배를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역사야 어찌되었건 루앙은 아름답습니다. '일은 파리에서, 사는 건 루앙에서'에서 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루앙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반목조건축물들입니다. 대부분은 15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루앙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입니다. 1821년 루앙에서 출생한 플로베르는 1857년 당대 최고의 작가라는 명성을 얻게 한 '보바리 부인'을 남겼습니다. 이 소설엔 루앙의 곳곳이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작가의 주관과 선입견을 배제하는 사실주의 소설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에서 당시의 풍속과 세태를 섬뜩할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여자의 일생'을 쓴 기 드 모파상은 그가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목조건축물 뒤로 루앙의 상징인 루앙 대성당이 보입니다.








루앙 대성당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입니다. 노틀담 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늘을 향해 탑이 뾰족뾰족 솟아 있는 모습이 정말 웅장합니다. 1063년에 창건을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 완성해 나갔습니다. 성당의 가장 높은 첨탑은 151m로 프랑스 교회중 가장 높습니다.








지베르니에서 만났던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 연작의 모델이 바로 이 노틀담 성당입니다. 그는 빛의 변화에 따라 대상의 형태와 색채가 달라진다고 보고 그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려 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루앙 대성당 연작입니다.

루앙은 모네 뿐 아니라 피사로, 고갱 등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이곳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던 무대였습니다. 그래서 루앙에선 자주 인상파 화가 전시회가 열리곤 합니다.








역시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법원 건물입니다. 루앙의 건축물들은 그 어느것이라 할 것없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정복왕 윌리엄과 잔 다르크와 플로베르와 인상파 화가들을 뒤로 하고 아름다운 노르망디 해안으로 달려 갑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