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역사는 곧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입니다. 지금의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으로 영토나 경제, 영향력 등 모든 면에서 세계의 보잘 것 없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함께 사실상 유럽의 중심이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욕이 깃들어 있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쇤부른 궁전입니다. 쇤부른 궁전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쇤부른 궁전을 베르사이유보다 더 화려하게 짓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모방하는 것은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이 궁전 아래쪽에 있는 것과 반대로 쇤부른은 궁전 위에 정원을 배치했습니다.






실내 역시 베르사이유 못지 않게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쇤부른 궁전을 자세히 보면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 장식도 베르사이유에 비해 훨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합스부르크가의 철혈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부터 40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끌었는데 슐레지엔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하긴 했지만 오스트리아를 절대주의적인 근대국가로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쇤부른 궁전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프랑스 혁명 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남겨 지금까지 철없는 왕비로 욕을 먹고 있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쇤부른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여제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였지만 공주의 숙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바로 정략결혼의 대상이란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세때 프랑스로 보내져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원대한 구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의 2대 명문가로 유럽을 거의 양분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두 가문은 오랫동안 때론 전쟁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대립해 왔습니다. 여제는 이 오랜 분쟁을 자신이 사랑하는 막내딸로 해소하고 싶었습니다. 거미줄같은 혼맥으로 전 유럽을 하나로 묶어냈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있어서 부르봉 왕조와의 혼사는 마지막 퍼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퍼즐은 프랑스 혁명으로 산산조각났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38세때인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런 생활로 프랑스 왕비로 있는 동안 내내 지탄의 대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적자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기름을 껴얹었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입니다. 이 얘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쓴 '고백론'에 등장하는 한 일화일 뿐이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런 왕비였지만 성난 군중앞에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고 합니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인에 대한 프랑스 전통 귀족들의 견제 심리도 이런 이미지 악화에 분명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쇤부른 궁전에서 일어난 마리 앙투아네트와 모차르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일찌감치 천재로 이름 날린 모차르트는 6살 때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전(御前) 연주를 위해 쇤부른 궁전에 온 모차르트는 천방지축으로 뛰다가 넘어졌는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준 사람이 바로 앙투아네트 공주였습니다. 당시 동갑이었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공주의 미모에 반한 것인지 6살의 모차르트는 공주에게 "나중에 커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물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쇤부른'은 아름다운 분수를 뜻합니다.  정원 끝에는 정말 아름다운 넵튠 분수가 있습니다.

위의 건축물은 '작은 영광'이란 뜻의 글로리테입니다. 1747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만들었습니다.






글로리테에서도 모차르트의 연주회가 자주 열렸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무척 아꼈던 모양입니다.






이곳은 중앙묘지입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오스트리아 유명인사들의 무덤을 모아 1894년 조성되었습니다.






중앙묘지엔 오스트리아 역대 대통령의 무덤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 같은 음악계의 거장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낭만파의 거장으로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 묘입니다.






바흐, 베토벤과 함께 3B로 불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묘입니다.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베토벤입니다.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입니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만약 이 음악계의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요? 생전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재능이 없다고 혹평했고, 바그너는 "교향곡은 베토벤에서 끝났는데 무슨 교향곡을 쓰느냐"며 브람스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베토벤은 악성(樂聖)으로 추앙받고 있고, 브람스의 교향곡은 베토벤과 필적한다는 평을 듣고 있으니 혹 사과라도 하지 않을까요?






중앙묘지를 나와 이제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왕궁으로 왔습니다. 주왕궁인 호프부르크 왕궁 옆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녀는 실제로는 황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그냥 황후입니다. 18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살리카 법에 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는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모든 실질적인 권력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한번도 왕도의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미인으로 소문난 공주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열 패밀리 답게 합스부르크의 상속자가 된 후 능수능란한 외교 수완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와 적대관계인 영국과 손을 잡거나 적절한 정략결혼 등으로 신성로마황제 자리를 노리던 수많은 정적들을 물리치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은 '외조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명예뿐인 황제직에 만족하고 정치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 과학 분야에서 여러 업적을 이뤘습니다. 쇤부른 궁전의 정원과 식물원, 동물원도 그가 만든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정략 결혼이 판치던 당시에 아주 특이하게도 연애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치에서 소외된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평생을 조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무려 16년간이나 상복을 벗지 않고 애도를 했습니다.

부부간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이 없었다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렇게 성공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영토를 지켜낼 순 없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호프부르크 왕궁으로 들어왔습니다.






호프부르크는 13세기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한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사용한 정궁입니다. 유럽 최대 가문의 왕궁답게 워낙 규모가 커서 이곳을 제대로 보려면 하루 갖고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합스부르크 가의 휘장은 머리가 두개인 독수리입니다.






휘장은 독수리지만 합스부르크는 원래 '매의 성'이란 뜻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만해도 프랑스 동부의 알자스와 스위스 북부에 걸쳐 있던 작은 영지의 영주에 불과했습니다. 11세기에 이곳에 성을 짓고 합스부르크 성이라 이름지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가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합스부르크 가가 세계 중심이 된 것은 바로 별 볼일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왕궁내의 카를대제 기마상입니다.

13세기 유럽은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를 맞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가 빈 것입니다. 황제 선출권을 가진 7명의 선제후들은  모두 이 자리를 탐냈으나 서로 세력이 팽팽했기 때문에 누구도 선뜻 제위를 차지할 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무한정 황제 자리를 비워둘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력 제후들끼리 정치적인 타결을 본 게 만만한 왕을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허수아비로 선택된 게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입니다.

당시엔 그 어느 누구도 허수아비로 선택된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제후들이 얕잡아봤던 루돌프 1세는 사실 굉장한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절묘한 혼인 정책으로 오스트리아를 손에 넣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기반을 옮긴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후 탄탄대로를 걸었습니다.
 
때론 전쟁도 불사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영토를 확장한 전가의 보도는 정략결혼이었습니다. 15기엔 오스트리아는 물론 독일 일부와 헝가리까지 차지,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우뚝 섰고, 16세기엔 역시 정략결혼으로 스페인까지 세력을 확장,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초에는 프랑스를 제외하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권이 아닌 나라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1천여년간 쌓아온 합스부르크의 아성이 무너진 것은 허무하다 할 정도로 순식간이었습니다.

18세기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들로 심약한 레오폴트 2세가 오르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균열이 오기 시작하더니 19세기 들어서자마자 프랑스에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결정타는 세계 1차 대전이었습니다. 패전국이 되면서 오스트리아 영토는 4분의1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오스트리아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합스부르크의 천년 영화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공화제 국가가 되었습니다.

1차 대전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때 독일에 합병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오스트리아 정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그 어떤 복귀도 허용치 않는 강력한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안은 1966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합스부르크 후손들은 일반 시민으로 겨우 오스트리아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