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의 바티칸, 에치미아진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입니다. 지나 가는 길에 '아라라트'라는 간판이 크게 보였습니다. 아라라트산은 아르메니아의 영혼과 삶,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이 담긴 영산입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라라트산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두산을 생각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그들은 아라라트산을 보며 살아왔고, 아라라트산에 그들의 영혼이 있다고 믿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터키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빼앗긴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는 어디서든 아라라트산의 눈덮인 설봉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진에 나오는 건물은 '아라라트'라는 꼬냑회사 본관건물입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동구권의 꼬냑브랜디를 이 아라라트 상표가 완전히 석권 했었습니다. 품질과 가격 모두 확실한 브랜디였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후 서방의 주류회사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게 이 아라라트 꼬냑입니다. 품질은 유명 브랜드에 결코 뒤지지 않는데 가격은 싸니, 아라라트가 서방에 소개되는 순간 시장 을 잠식 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던 겁니다. 

특히 프랑스의 위기감이 더했습니다. 이에 대한 프랑스의 대책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이 회사를 인수해 버리는 거지요. 현재 아라라트 꼬냑은  시바스 리갈, 로얄 샬루트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회사인 페르노 리카르트 그룹 소유입니다.




      

예레반의 캐스캐이드에서 본 시내 모습입니다. 1907년에  새롭게 건설한 예레반은 온 시민의 아이디어를 모아 도시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매우 짜임새 있는 도시로 꼽힙니다.

이제 '아르메니아의 바티칸'이라고 불리는 에치미아진으로 가보겠습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택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적 성지가 바로 에치미아진입니다.

에치미아진에는 크게 3개의 성당이 있습니다. 기독교 전래 당시 순교했던 흐립스민 수녀를 기리는 흐립스민 성당, 또한 같이 순교 당한 36명의 수녀를 기리는 가이안 성당, 그리고 최고의 성지 중의 성지인 마더 성당이 그것입니다. 

먼저 흐립스민 성당으로 가보았습니다.   

우리가 방문 한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성당마다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좋은 구경거리입니다.

아르메니아 사도회의 신부님 집전으로 거행된 결혼식은 하객들과 들러리, 주인공인 신랑신부 모두 너무나 순수한 표정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카메라 세례에도 기꺼이 밝은 미소로 응해주었습니다.

코카서스에 미인이 많다고 하는데,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아마 제일 멋진 옷으로 꾸미고 나왔을테지요)의 면면을 보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연예계 스타의 결혼식인 줄 착각할 정도로.

이번엔 가이안 성당입니다. 외관으로 보아 흐립스민 성당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정문 파사드에 인상적인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아기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 세 사람의 경배를 그려놓은 듯합니다. 혹시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르메니아에서 온 사람들임을 암시하는 것일까요?  다분히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작지만 간결한 맛을 지닌 가이안 성당을 나와 에치미아진 최고의 성지인 마더성당으로 이동합니다.

마더 성당의 동쪽 출입구입니다. 이곳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조형물이 있었는데,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것입니다.

아르메니아 사도회는 엄연히 로마 가톨릭과는 계보가 다릅니다.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간섭을 받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여 조형물을 세운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더 성당의 입구입니다. 아주 희미하지만 정문 아치 바로 위에 작게 사람의 얼굴을 조각해 놓은 것이 보일 것입니다. 16세기에 새겨 놓은  페르시아 왕의 얼굴입니다.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마더 성당이 파괴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면에 그들의 왕의 얼굴을 조각해 놓음으로써 파괴를 막아보고자 했던 것이랍니다.  자신들의  왕 얼굴이 새겨져 있으니 감히 파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에치미아진은 성지 중의 성지입니다. 그루지야의 므츠헤타에 있는 스베르티호벨리 성당에는 예수님의 성의가 묻혀 있다고 했는데, 아르메니아의 성지 마더 성당 보물실에는 이에 필적할 경이로운 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을 때 로마병사가 옆구리를 찔렀다는 창입니다. 학예사가 나와서 여러 역사적 사실을 들어 진본임을 설명합니다.

노아의 방주 배조각을 바탕으로 만든 십자가입니다. 인근에 있는 아라라트산이 노아의 방주가 닿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배조각이 이곳에 있는게 어쩌면 당연할 것입니다.

최고의 성지 마더성당이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많은 것이 변해 갔습니다. 국가 권력자나 돈많은 사람들이 이 위대한 가치를 지닌 성지를 그냥 내버려 둘리 없겠지요. 나름 상당히 치장을 했습니다. 제대 위의 샹들리에도 그렇고 화려한 보석이 박힌 각종 장식들도 그렇습니다.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상당히 화려합니다. 곳곳에 금박이 입혀져 있습니다. 에치미아진의 마더 성당이 대단한 성지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성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오히려 얼마 전에 다녀온 아흐파트 수도원과 사나힌 수도원이 그리워졌습니다. 그 소박하면서도 텅빈 공간에 가득했던 숨막히는 경건함 말입니다.

마더 성당 보물실에 있는 예수님을 찌른 창, 노아의 방주 배조각 등이 진본인지 아닌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심하지 않고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기도하는 여인에게 '저 창이 진짜라는 증거 있어?' 라고 물을 수 없음입니다.  

마더 성당을 나오면서 젊은 신학생들이 줄을 지어 순례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는 아르메니아, 그들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어쩌면 종교적, 문화적 자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더 성당을 빠져나오면서 보니 여전히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터키와 이란, 러시아 등 종교적 성격이 다른 강대국들 사이에서 혹독한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왔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가슴에  마더 성당이 있는 한 그들의 자부심은 쉽사리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에치미아진을 떠나 예레반으로 돌아오는 길에 즈바노츠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건물은 무너지고 앙상한 기둥들만 다시 복원해 놓아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뭔가 특이힙니다. 기둥의 형태를 보니 그리스의 이오니아식 기둥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변에는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가 즐비합니다. 예전에는 대단히 큰 건축물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 돌무더기 잔재만 남아있는 곳이 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붕괴되기 전의 모습을 유추한 설명을 들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7세기에 건립된 이 수도원은 그리스양식과 비잔틴 양식, 아르메니아 고유양식을 총결합하여 만든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는 것입니다.

10세기에 지진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는데, 만일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앙코르와트에 버금가는 위대한 유산이었을 것입니다.

7세기 최고의 건축가이자 군주였던 네르세스 3세가 '세상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최고의 걸작'을 만들겠다고 심혈을 기울였던 즈바노츠 수도원.... 하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도 지진과  같은 자연 앞에서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터키땅이 되어버린 아라라트 산이 즈바노츠 수도원의 잔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현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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