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귀국만을 남겨둔 상태로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예레반의 최고 중심지인 공화국광장에 있는 호텔에 투숙해서 저녁식사 후에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마침 주말이라 공화국 광장의 분수에서  분수쇼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주로 가족 단위로 산책나온 현지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예레반의 번화가를 걷다보면 이곳이 빈국(貧國)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리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깨끗한 보행자 거리와 번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합니다. 게다가 유럽풍의 카페와 식당들도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나라중 하나지만 유럽풍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현재 아르메니아 경제의 유일한 희망은 해외 이주자들의 국내 송금입니다. 당연히 국내에 자금을 투자한 해외 이주자들의 정서가 거리에 녹아있는 것입니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유럽적인 사회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번엔 예레반의 재래시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실내 공간에 상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세상 어디나 재래시장은 활기찬 분위기와 함께 사람 사는 내음이 가득합니다.







예레반 재래시장에서 파는 물건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견과류입니다. 살구와 땅콩, 호두 등을 말려 배합한 상품이 많았는데, 맛을 떠나 그 문양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예레반의 자존심인 오페라하우스건물입니다. 우리들에게 의미있던 부분은 바로 이 건물이 전에 다녀왔던 에치미아진의  즈바노츠 성당을 그대로 복원하여 건축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도시 너머로 아라라트 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저곳은 터키땅입니다. 벌써 여러차례 얘기했지만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혼과도 같은 아라라트산입니다. 마치 도시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만... 매일 저 산을 보면서도 갈 수 없으니 아르메니아인들의 터키에 대한 증오심이 이해가 갔습니다.  







다음에 올라간 곳은 캐스 캐이드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소비에트 연방 가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일종의 문화공간이자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Gerald L Cafesjian이라는 건축가가 설계해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총 5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는 캐스캐이드는 각 층마다 독특한 조형물과 분수, 정원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르메니아 현대 조형예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층마다 계단밑 공간은 갤러리와 공연장으로 가득하여 종합 예술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코카서스 3국 중 가장 훌륭한 문화적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자부심을 안고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열정이 집약된 모습입니다.







캐스캐이드를 조성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 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이주해 나간 사람들의 성금으로 채워졌습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쫓겨나다시피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 만큼은 세계 최고인것 같습니다.  







캐스캐이드 제일 아래 층에는 설계자이자 건축가인 Gerald L Cafesjian의 동상이 서있었습니다. 도면을 펼쳐놓고 고뇌하는 표정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제 방향을 바꿔 아르메니아 최고의 자랑꺼리인 마테다다란으로 가봅니다.

아르메니아는 AD 4세기 경에 성 메스로프 마슈토트에 의해 고유문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당시의 문자와 언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거의 1,600년의 세월 동안 변변한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지만 그 문자를 지켜냈다는 점은 진정 경외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문자기록 보관소인 마테다다란의 입구에는 성 메스로프 마슈토트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관 입구에는 아르메니아 역사의 위대한 위대한 인물 4명의 동상이 서있어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마테다다란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들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벽면에 그려진 그림이 아르메니아 역사를 함축해서 보여줍니다. 아르메니아 문자가 발명되면서 문명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오른쪽에는 붕괴되기 전의 즈바노츠 성당이 보입니다. 4세기에 발명된 문자와 7세기에 건축된 당대 최고의 건축물인 즈바노츠가 아르메니아 자부심의 핵심입니다. 







마테다다란 내부는 원칙적으로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관리인의 특별 허가를 받아 몇 장 찍을 수 있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허술해 보이지만 진열된 서적 하나하나가 국보급 문화유산입니다.

성경이 최초로 번역된 것도 아르메니아 문자에 의해서였고, 실크로드 교역 시절에는 대상들의 만국 공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문자로 기록된 책들은 단순히 성경사본 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학, 천문, 의학, 역사 등 모든 부분을 망라하여 책이 기록되고 발간되었습니다. 14세기에 발간된 이 의학서적은 뇌수술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즐비한 사원에서도 이와 같은 금석문이 발견됩니다. 물론 아르메니아어입니다.







아르메니아를 떠나기 전에 학살추모관을 찾아갔습니다.

터키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극은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그 누구도 이 부분을 문제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묻혀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인들은 가슴 속에 커다란 울분 덩어리를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아직도 묻혀 있는 그 설움의 현장에서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압둘 하미드 2세 치하의 터키는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량학살했습니다. 대부분은 지식인과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범아르메니아계의 통합과 독립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선도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처형된 아르메아인은 줄잡아 2만 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이번에는 터키 영토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로 사막으로 몰아내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2차대전중 독일편에 섰던 터키는 연합국의 일환인 러시아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자국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편에 서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상황이야 어떠하건 아무 죄없는 여성들과 노인, 어린아이까지 사막으로 내몰려 방항끝에 죽음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어림잡아 150만 명에 이르는 숫자입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하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였지만 이내 역사속에 묻혀버리고 잊혀진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르메니아 학살추모관의 전시관에 나열된 사진들이 이 비참한 학살극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탑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깃든 아라라트 산을 형상화하여 만들었습니다. 두개의 탑이 합쳐져 하늘로 솟아오른 모양새인데, 현재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서로 합심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아르메니아의 가슴에 맺힌 한은 언제쯤 풀리게 될지 요원하기만 합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