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케이프타운을, 아니 남아공을 여행하는 주목적 중 하나가 희망봉을 찾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희망봉이 아프리카 최남단이 아니라는 것도, 희망봉이 별 볼품없는 작은 봉우리라는 것도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역사를 바꿔놓은 희망봉의 발견 내용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야 어찌되었건 케이프타운에서 희망봉으로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도로가 바다를 따라 구불구불 나 있었는데 대서양과 인도양을 번갈아 가며 볼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누구든 희망봉에 오면 그 짙은 코발트 빛 바다에 넋을 잃게 됩니다.












전체적인 조망을 보기 위해선 룩 아웃 포인트라는 등대 전망대까지 오르는 게 좋습니다. 그곳까진 산악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바로 저 곳이 희망봉입니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인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의해 첫 발견되었고, 이는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 젖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디아스의 생각과 달리 희망봉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최남단은 희망봉에서 남동쪽으로 150km나 더 간 곳에 있는 아굴라스 곶이란 곳입니다. 



  



등대 전망대에 오르면 더 멋진 바다 전망이 보입니다.

















전망대에 오르니 세계의 주요 도시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 표지판에도 북경과 동경은 있어도 서울은 없습니다. 서울이 함께 표시된 표지판은 세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북경과 동경의 거리를 보니 정말 먼길을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망봉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포트투갈에서부터 디아스가 악전고투 험로를 헤쳐온 대서양이고, 왼쪽은 나중에 바스코 다가마가 이뤄낸 인도로 가는 인도양입니다.







전망 등대에서 내려와 희망봉으로 가보았습니다. 희망봉임을 알리는 이 표지판 앞은 늘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희망봉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희망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폭풍의 곶'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곳은 한류인 인도양과 난류인 인도양이 만나 늘 풍랑이 거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간 날에도 별 바람이 없었음에도 파도가 제법 거칠었습니다.







디아스의 해상탐험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습니다.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을 따라 내려온 디아스의 함대는 급기야 희망봉 근처에서 강풍에 밀려 표류하고 말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후 다시 항로를 잡아 되돌아오다가 희망봉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디아스는 희망봉 발견 후 계속해서 인도양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지만 공포에 질린 선원들은 해상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디아스는 다시 배를 고국인 포르투갈로 돌리고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나비 효과란 말이 있습니다. 북경에서 나비가 일으킨 바람이 한달 후 뉴욕에선 폭풍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15세기 동방에는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자리하게 됩니다. 바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입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융성은 유럽에겐 경제적으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간 중국과 인도를 오가던 교역로가 완전히 막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육식을 주로 하는 유럽인들에겐 동방의 후추같은 향신료가 꼭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무역로가 막히면서 향신료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이는 유럽 각국에게 엄청난 정치 경제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특히 동방과 멀리 떨어진 포트투갈과 스페인의 피해가 가장 막심하였습니다.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향신료의 일부를 유통시키고 있었는데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가격은 고사하고, 아예 향신료를 보급조차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맨 먼저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인해 육로가 막히자 이를 우회하는 해상무역로를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왕실에서 직접 탐험대를 조직하고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디아스가 고국으로 돌아온 후 포르투갈은 드디어 바다를 통해 인도와 중국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폭풍의 곶'이 포르투갈 왕실에 의해 희망봉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희망봉에 가면 늘 이 바분 원숭이들이 짓궃은 장난을 칩니다. 이렇게 차에 절묘하게 매달려 운전자들을 어쩔 줄 모르게 하는데 갈 때마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원숭이가 이 장난에 재미들린 모양입니다.







암튼 포르투갈은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덕에 그 다음 탐험대를 이끈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 이를 수 있게 되었고, 원하던 향신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국 등의 대규모 해상 진출을 불러왔습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으로 시작된 이 일련의 역사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인도양과 태평양 상의 많은 섬들은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럽에겐 희망봉이었지만 그 외 국가들에겐 절망봉인 셈입니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