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2. 9. 20. 06:00


한여름의 더위에 지친데다 교통체증까지 겹쳐 프랑스 니스의 호텔에 도착하는 시간이 다소 늦어졌습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체크인을 하고 돌아서는데 몇 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작은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함께 한 일행들이 걱정할까봐 일단은 태연하게 레스토랑으로 안내한 후 자리에 앉아 가방 안에 있던 물품들을 차근차근 기억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여권과 지갑은 따로 보관했으니 치명적인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카메라가 아까웠습니다. 큰맘 먹고 장만한 값비싼 카메라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찍은 사진을 어젯밤에 다운받아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카메라가 너무 무거워 힘들었는데 이참에 가벼운 카메라로 바꾸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글라스도 없어졌습니다. 선글라스는 그동안 잃어버리기를 밥 먹듯 해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도 가방에 있었습니다. 멀쩡한 핸드폰을 두고 스마트폰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 또한 어차피 전화와 문자 외에는 별로 사용할 줄도 모르니 서랍에 있는 옛 핸드폰을 다시 사용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가방을 도난당했어도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워낙 물건들을 잘 흘리고 다니는 나로서는 이미 사라진 물건에 대한 포기도 빠른 편입니다. 이날도 가방은 잃어버렸지만 큰 미련 없이 편하게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호텔방을 나서려는데 왠지 허전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내 가방이 없어졌다!!’

항상 내 분신처럼 옆에 달라붙어 있던 가방이 없어진 것입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나와 함께 여행한 녀석이었습니다.

어제는 가방 안에 있던 물건들만 생각했지 정작 가방이 없어진 것은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카메라, 선글라스, 핸드폰 따위가 아니라 가방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14년 전, 처음 여행업에 뛰어들어 첫 출장을 준비하던 때, 마땅히 들고 갈 서류가방이 없어 장롱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내가 말없이 나가 사들고 온 것이 이 가방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녹록치 않았던 살림살이에 비해 꽤나 비싼 가방이었습니다.




이젠 세월이 흘러 낡고 낡아서 제 힘으로는 똑바로 서있지도 못하는 가방이지만 막상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소중한 의미로 다가와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만일 도둑과 연락이라도 된다면 안에 있는 물건들과 사례금까지 줄 터이니 가방만은 돌려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호텔을 떠나 이탈리아를 향해 가고 있는데 니스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도둑이 잡혔으니 가방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가방은 물론 안에 있는 물건도 고스란히 그대로라니 이건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친퀘테레에서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일행들과 헤어져 혼자 니스로 달려갔습니다. 가방이 너무 낡았으니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오는 아내에게 이번 여행만 들고 가겠노라고 답하고 들고 온 가방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서에서 가방을 다시 만나는 순간 가방에게 약속했다. ‘끝까지 같이 가자’고.

지금 내 옆엔 예의 그 낡은 가방이 삐딱하게 누워있습니다. 일을 하다가도 눈길이 가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옵니다.

“세상 가방들 중 너보다 여행 많이 한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