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남프랑스 출장을 마치고 나 자신에게 주는 귀중한 선물, 휴가를 다녀왔다. 어디를 갈까 고심 끝에 선택한 지리산 둘레길. 힘든 등산은 싫고 휘적휘적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어 무작정 남원 행 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서니 문득 2009년 카미노 데 산티아고 길을 걷던 생각이 났다.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기 전에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장장 900km의 길을 겁도 없이 시작했는데, 고작 하루 걷고 나서 후회막급이었다.
무거운 배낭에 어깨는 빠질 것 같고 발은 당장 한걸음도 걸을 수 없을 만큼 아프고, ‘내일 또 걸을 수 있을까?’ 온통 의문인 채로 잠들던 수많은 밤들. 하지만 그 뒤로도 여러 날을 ‘나는 지금 왜 이 길을 걷고 있는 건가‘ 무수히 되뇌면서도 걷고 또 걸었고 결국 45일 만에 주파해냈다. 지금도 이 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평소에도 걷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 뒤로 는 걷기에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대체 길에는 어떤 마력이 있기에...
지난 가을 친구와 함께 설악산 봉정암에 오르는 순례길에서 한 가지 깨우친 것이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오르막길, 끝이 안 보이는 험난한 고개를 넘으며 이미 이 길을 여러 번 걸으셨던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가 걸었던 길. 아주 오래 전부터 모든 이들이 힘들게 올라갔을 길.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 돌이켜보니 카미노 길을 걸을 때에도 나는 혼자였지만 그 길을 걸었던 모든 순례자들의 힘이 나를 이끌어줬던 것 같다.
길을 걸으면 머릿속은 비워지고, 마음은 새로운 힘으로 채워진다. 2009년의 카미노 길은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힘을 더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테마세이투어라는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다. 다른 길이 그러했듯, 이 길에서도 나를 이끌어주는 마력의 힘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이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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