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3. 11. 27. 06:00


칠성사이다 한 병, 뽀빠이 한 봉지, 아카시아 껌 한통을 가방에 꾸려놓고 혹시 비가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문지방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 날의 기억이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여행’은 별나라 이야기였던 것 같다. 기껏해야 학교 인근의 고궁이나 왕릉을 다녀오는 학교 소풍이 그토록 설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거의 행군과 다름없는 소풍길에도 가방 속에 들어있는 칠성사이다 한 병이 얼마나 큰 뿌듯함이었는지 모른다. 그땐 정말 그랬다.

 

80년대 이후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가생활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그렇지만 당시는 여행보다는 ‘유희’의 개념이 강했던 시기였다. 관광버스를 타고 야외로 나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해야 제대로 놀았다는 소리가 나왔다. 물론 해외여행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얼마 전에 첫 해외여행을 화제로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첫 해외경험이 홍콩으로의 회사 출장이었다는 분의 이야기가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고작 4일간의 출장이었지만 외국으로 나가는 것인지라 집안 어른들에게 고루 인사를 올리고, 고향 선산을 찾아가 사뭇 비장한 각오로 조상들께 제를 올린 후 출국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분은 처음 해외로 출장 가는 날 온 가족과 친지들이 김포공항에 나와 환송을 해주었는데 괜히 눈물이 핑 돌더라는 말씀이었다.

 

지금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지만 70-80년대엔 해외로 나가본다는 것이 가문의 영광인 시절이었다.


 


나의 첫 해외 여행지는 인도였다. 그리고 혼자 떠난 첫 배낭여행지는 네팔, 그것도 안나푸르나 트레킹이었다. 한동안 산에 미쳐 전국의 산들을 섭렵하고 다니던 내게 ‘히말라야’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어서 변변한 정보조차 얻지 못한 채 무작정 떠났던 그 길은 여행중독자가 되는 길이었다.

 

이후부터 방학이면 배낭을 둘러메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갔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내 월급으로는 여행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새벽에 우유배달을 하고 퇴근 후에는 족집게 과외를 해가며 여행비를 모았다. 하루 3-4시간만 자면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가 여행을 위한 것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에 단단히 홀렸던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힘들여 떠났던 여행이기에 나의 여행은 항상 ‘비장함’ 속에 이루어졌다.

 

1988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이후 지금은 한 해 1,000만 명 이상이 해외로 출국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젠 공항으로 환송 나가기는커녕 직계가족이 아닌 이상 누가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도 모른다. 내 경우는 더욱 심하여 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이후부터 여행은 평범한 일상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여행가방 꾸리기도 거의 달인의 경지에 올라 요즘엔 출장 가는 날 아침에 후다닥 가방을 꾸려 나갈 정도다.

 

하지만 지금도 내게 있어서 여행은 항상 비장하다. 소풍 전날의 그 두근거림도 여전하다. 가방에 챙겨가던 칠성사이다 한 병 같은 뿌듯함도 마찬가지다.

 

여행이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많이 해도 아무 감흥 없는 습관이 결코 되지 않는다. 항상 새롭고 항상 설레며 항상 비장하다. 그래서 가고 또 가도 종착점이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여행인 것 같다.

                                                                                                                                                            [마경찬]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