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3. 12. 31. 06:00

 


예전엔 지방으로 여행을 갈라치면 지도책부터 챙겼었다. 어느 길을 통해 갈 것인지, 가는 길에 볼만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지도에 동그라미를 쳐가며 숙지하는 것이 여행 준비의 첫 순서였다.

 

그런데 요즘엔 세상이 참으로 편해졌다. 내비게이션을 믿고 따라가면 그만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비 때문에 수고와 시간은 절약되겠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참 많은 것 같다. 내비를 따라 가다보면 목적지는 정확하게 빨리 도착할지라도 ‘길’을 잃기 십상이다. 내비화면을 따라갔을 뿐 어떤 길을 어떻게 왔는지 그 과정인 ‘길’에 대한 기억은 없는 게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그나마 내비가 없다면 목적지를 찾아가기도 정말 어려울 것 같다. 불과 1-2년 사이에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고 마을의 지형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길과 마을만 바뀌는 것도 아니다. 이정표 역할을 했던 건물도 순식간에 재건축되어 사라지거나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하기 일쑤다. 우리나라처럼 전 국토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나라도 없는 것 같다.

 

지방을 고향으로 둔 도시인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의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처럼 급격히 모든 것이 변해가는 시대에 살다보니 아무리 고향이라고 해도 낯선 타향에 다름 아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마을, 유행가 가사처럼 이뿐이 곱뿐이가 모두 나와 반겨주지는 않더라도 기억속의 정겨운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네 어귀의 작은 교회당과 흙담이 이어지는 골목길, 뛰어 놀던 뒷동산, 물고기 잡던 작은 개울 등등이 옛모습 그대로의 고향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옛 추억을 회상하며 다시 찾아가고 보면 대부분 낯선 모습으로 변해 있어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해남의 달마산 미황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호젓한 산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이 작은 사찰은 오가는 이도 별로 없는데다가 퇴색한 단청과 낭랑한 풍경소리가 주는 적막함이 조용히 심신을 쉬게 해준다.’고 장황하게 꼬드겨서 먼 길을 떠나온 터였다.

 

하지만 막상 미황사에 도착한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말끔한 포장도로가 미황사 앞까지 이어지고 넓은 주차장엔 대형 관광버스들이 즐비했다. 게다가 어느새 증축을 했는지 작고 아담했던 미황사는 여러 개의 부속건물을 거느린 대사찰로 변해 있었다.

 

난 이런 모습들이 정말 혼란스럽다. 어디를 가든 내 기억속의 단면들을 되살리기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추억속의 장소들은 매번 갈 때마다 새롭게 포맷을 해서 다시 입력해야 한다.

 

위와 같은 측면에서 보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유럽의 마을들이 정말 부럽다. 대부분 100년 전에 찍은 사진 속 마을의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별 차이가 없다. 심지어는 19세기의 그림 속에 나오는 마을도 찾아가 보면 마치 어제 그려진 것처럼 똑 같은 모습이다.

 

난 이런 모습에서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안정감이 느껴진다. 유럽인들의 마을은 삶을 영위하는 터전이자 든든한 울타리인 것 같다. 객지를 떠돌다가도 그리움에 찾아가면 추억속의 영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어쩌면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는 것 같은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길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기계가 알려주는 방향으로만 질주하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절대 내비게이션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추억이라는 장소를 찾아가는 길을 알고 싶다.

 

                                                                                                                                                       [마경찬]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