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4. 1. 21. 06:00

 

태국에서 칸차나부리를 방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로도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를 보기 위해서다.

 

1940년대, 대동아 공영권을 기치로 아시아를 휩쓴 일본군은 인도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보급로 확보 차원에서 꼭 필요한 것이 콰이강의 다리 건설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상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들을 동원하여 다리를 완성해내고 말았다. 9만여 명의 연합군 포로들이 목숨을 잃은, 피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얼핏 우리와는 관계없어 보이지만 콰이강의 다리 공사에는 우리 민족의 처절한 비극이 서려있다.

 

연합군 포로들에게 노동을 시키면서 통역이 필요했던 일본군은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우리나라 젊은이 52명을 징집하여 공사현장으로 보냈다. 당시에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다면 최고의 엘리트 집단에 속한 젊은이였을 터이다. 그들은 일본군복을 입고 포로들과 일본군 사이에서 통역 업무를 했지만 지옥 같은 공사현장에서 똑 같은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윽고 전쟁이 끝났다. 52명의 젊은이들은 드디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아무도 귀국할 수 없었다. 비통하게도 우리의 젊은이들은 일본군과 똑같이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런 역사 때문에 콰이강의 다리 주변은 일본군의 만행과 잔인함을 상기하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태국의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난 달, 오랜만에 콰이강의 다리를 찾아갔다가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 밑에 일장기와 함께 전범기인 욱일승천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에 나치기가 걸려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광경이기에 그랬다. 전범기가 걸려 있는 곳은 다리 바로 밑의 공사현장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필경 일본자본이 무료로 공사를 해주고 있는 현장일 것이다.

 

이런 모습은 동남아의 여러 곳에서 이미 목격한 바 있다. 캄보디아에서도, 미얀마에서도 일본이 건설해 줬다는 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그런 곳에는 여지없이 ‘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일본어 팻말이 꽂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 때 일본에 점령당했거나 큰 피해를 입었던 동남아 국가들에 있어서 ‘침략자 일본’은 서서히 ‘고마운 일본’으로 이미지가 바뀌어가고 있다.

 

 

 

 

당황스런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제스박물관을 찾아갔다. 콰이강 건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과 연합군 포로들의 고통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박물관의 전시내용이 정말이지 교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전시물 그 어디에서도 침략자 일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거 일본제국의 위상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의례히 희생을 동반한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콰이강의 비극을 덮으려는 의도도 엿보였다.

 

현지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니 콰이강의 다리 주변에 ‘제스박물관’이라는 이름의 전시장이 4개나 더 생겼다고 한다. 물어보나마나 일본이 역사왜곡을 위해 손을 쓴 것이다.

 

전시장을 나와 바로 옆의 조그마한 평화공원에 들어갔다. 보란 듯이 ‘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망언에 분기탱천하여 흥분하고 있을 때 일본은 치밀하게 전범국가의 색채를 서서히 지워가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차나부리는 그 현장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군사 재무장의 길을 차근차근 밟고 있는 일본이다. 그래서 더욱이나 그 치밀함에 몸서리가 쳐지는 여행이 되었다.

                                                                                                                                                           [마경찬]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