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4. 3. 19. 06:00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눈이 마냥 좋다. 솜이불 같이 포근하게 쌓인 눈을 보면 가을의 가슴 시린 쓸쓸함에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다. 불행하게도 올해는 눈이 큰 재앙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미안하지만 나는 눈이 좋다.

 

하늘 가득 퍼붓는 함박눈도 좋고 칼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눈보라도 좋지만 무엇보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이 가장 반갑다. 새벽에 일어나 커튼을 여는 순간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을 맞이하는 기분은 언제라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캐나다 눈꽃열차와 오로라’라는 테마로 떠난 지난 겨울여행,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그토록 좋아하는 눈 속에 원도 없이 파묻혀 지낼 수 있었다. 비아레일을 타고 재스퍼로 이동하는 내내 철로 양편은 하얀 눈 세상이었다. 특히 로키지역으로 진입한 후에는 간혹 이름 모를 새들만 날아오를 뿐 인적 없는 원시림의 설경이 고즈넉한 정취를 발산하고 있었다. 때로는 침엽수림 위에 가득한 눈꽃터널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했다.

 

눈에 취해 백색의 세상을 헤매다가 혹한의 땅 옐로나이프에 도착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함이다. 우리에게는 3일의 기회가 주어졌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혹시라도 오로라를 못 보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앞선다. 하지만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첫날, 장작불이 타오르는 티피 안에 앉아 따듯한 차 한 잔을 마시던 중 밖에서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나가본 밤하늘엔 오묘한 푸른빛의 빛줄기들이 수줍게 얼굴을 드러내며 사뿐히 소리 없이 다가오더니 이내 흥에 겨운 듯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맹렬한 기세로 기운을 뻗혀 밤하늘을 가르며 서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오로라의 향연은 3일 내내 이어졌다.





우리들 또한 밤마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새벽녘까지 오로라의 지휘에 맞춰 춤을 췄다. 참 신기한 것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젯밤의 축제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한바탕 달콤한 꿈속을 유영하고 빠져나온 듯한 기분일 뿐.

 

밤에는 오로라에 취해 있다가도 낮에는 다시금 눈 속에 빠져들었다.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질주하기도 하고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눈이 두껍게 쌓인 숲속을 걷기도 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옐로나이프의 겨울은 흑백필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로키지역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캐나다의 최대 관광지인 밴프 국립공원과 요호 국립공원 등을 돌아보는 순서였다. 이곳 역시 두터운 눈에 파묻혀 있었다. 미네완카와 투잭 호수, 에머랄드 호수 등도 예외는 아니었고 하룻밤을 의지했던 샤또 레이크루이스도 설경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환상적인 물빛을 볼 수 없다 해도 전혀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여행자의 발길이 끊겨 정적이 감도는 호수의 분위기는 다분히 시(詩)적인 영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며 걸을 때마다 동화속의 설국으로 한걸음씩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지난 겨울은 정말 행복했다.

                                                                                                                                                          [마경찬]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