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2015. 12. 3. 06:30

 

작년 이맘때쯤 텔레비전 좀 그만 보고 같이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아보자며 남편과의 진지한 의논 끝에 장만한 것이 명화그리기 DIY 세트이다.

 

아무 정보도 없이 무작정 주문한 거라 난이도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그냥 평소에 좋아 하는 그림을 골랐다. 그리하여 우리 집에 배달된 신윤복의 단오풍정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의 흥분과 설렘이 기분 좋았다. 신윤복의 단오풍정부터 꺼내들었다. 깨알같이 나누어져 있는 캔버스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좁쌀크기만한 색깔 숫자들이 날 압박해왔다.

 

 

 

 

 

 

 

연한 색(1)부터 칠하라는 설명서에 충실하게 머리를 박고 손톱크기만한 공간에 색을 칠해나가기 시작했다. 한국화는 여백의 미라고 했던가!! 연한 분홍색 - 더 연한 분홍색 - 더더 연한 분홍색 등등 색구분도 잘 안되고 칠해도 티도 안나니 곧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양반다리로 장시간 앉아서 작업하려니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그야말로 고난의 시간이었다. 2~3시간 꼼짝 않고 칠하고 나서 몸을 움직이려면 어구구라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취미생활을 이렇게 힘들게 해야 되냐며 인내심 없는 남편은 초반에 떨어져나가고 나와 캔버스간의 외로운 싸움이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루하게 이어져오고 있다.

 

바쁜 출장 시즌이 지나고 구석에 모셔놓았던 캔버스를 다시 꺼내들었다. 어느덧 인고의 시간이 지나 나만의 편한 색칠 자세도 개발되고 붓도 내 나름으로 손질하며 색칠하기에 익숙해졌다. 손꼽아 기다려왔던 그네 타는 여인의 다홍색 치마를 칠하는 순간에는 알 수 없는 희열까지 느껴졌다.

 

 

 

 

 

 

후반부로 갈수록 완성된 모습이 너무 궁금해 색칠에 더욱더 매달리게 되었는데 다 칠해져갈수록 원작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좀 속상하긴 하다. 역시 정교한 색칠하기에도 불구하고 원작자의 그 느낌까지는 카피할 수 없는 것이겠지~.

 

화가라는 직업의 어려움을 백분의 일이나마 짐작해봤다는 것과 눈감아도 생생히 떠오르는 단오풍정의 모습, 그리고 모든 잡념이 사라지던 집중의 즐거움이 남았다. 어느덧 완성단계에 접어든 단오풍정에 뿌듯해하다가 옆에 놓인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상자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끝장을 봐야 풀리는 성격상 올 겨울이 가기 전에 저 상자를 개봉할 테고, 고흐를 만났던 남프랑스 아를의 시퍼랬던 밤하늘을 떠올리며 연한 파랑 - 진한 파랑 - 더더 진한 파랑등과 함께 또 인고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이은정]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