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2016. 6. 10. 07:00

 

 

나른한 주말,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친구의 SNS를 구경하다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사진을 한 장 보았다. 새빨간 장미꽃으로 발코니가 뒤덮여 있는 카사 바트요였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사 바트요는 알록달록하고 독특한 모양의 외관으로 유명한데, 왜 굳이 이 아름다운 외관을 장미꽃 장식으로 가려야 했을까?

 

 

 

 

 

 

 

해답은 조르디 성인의 축일에 있다. 매년 423일은 카탈루냐 지방의 수호성인인 조르디 성인을 기리는 날로, 바르셀로나 곳곳은 장미 향기가 진동하는 로맨틱한 장소로 변신한다. 거리마다 장미를 파는 상인들로 가득하며 남자들은 손에 장미꽃을 들고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가는데 이는 조르디 성인의 전설과 관련이 깊다.

 

옛날 옛적, 카탈루냐 지방엔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독한 용이 살았었다.

 

나라에선 이 용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매년 아리따운 처녀 2명을 무작위로 뽑아 제물로 바쳤다. 어느 해엔 공주가 제물로 뽑혔는데, 두려움에 떨고 있던 공주를 구하기 위해 조르디라는 기사가 용과 싸우게 되었다. 혈투 끝에 기사의 창에 쓰러진 용의 몸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왔고 이 피에서 장미가 피어났다. 조르디는 이 장미를 꺾어 공주에게 바치며 사랑을 고백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가우디 역시 산 조르디 전설에 영감을 받아 카사 바트요를 설계하며 조르디의 메시지를 곳곳에 남겨놓아 성인의 용감함과 애정을 후대에 전달하고 있다.

 

카사 바트요의 지붕은 쓰러진 용의 등비늘이고 하얀 기둥은 성인이 용에 꽂은 창이다. 발코니의 뼈 모양은 용에게 희생당한 처녀들을 상징하며, 건물 전면의 푸른 타일은 용이 살던 연못이다.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발코니를 장식한 장미꽃이라니, 담당자의 센스에 그저 감탄이 나온다.

 

 

 

 

 

 

그뿐이랴, 마침 423일이 스페인 국민이 셰익스피어보다 더 위대하게 여긴다는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기일이기에 장미를 받은 여성들은 답례로 남성들에게 책을 선물한다. 관광객들이나 구경하던 시시한 기념품이 치워지고 꽃과 책으로 점령당한 람블라스 거리를 상상해 보라!

 

몇 해 전, 교환학생으로 홀로 바르셀로나에서 공부하던 나도 이 날만큼은 그 낭만적인 분위기를 실컷 즐겼었다. 비록 나에게 꽃을 줄 사람도, 내가 책을 선물할 사람도 없었지만 거리에서 홍보용으로 나눠주던 장미꽃 한 송이를 손에 쥐고 나 자신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며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같이 들떠있었고, 일 년에 단 한 번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카탈루냐 주정부 청사 지하의 산 조르디 예배당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여행의 성수기, 낭만이라고는 잊고 살고 있는 여행사 직원은 오랜만에 과거를 추억하며 다짐했다. 한 손엔 책, 한 손엔 꽃을 들고 장미로 뒤덮인 카사 바트요를 언젠가 다시 방문하기로,

[임윤진]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