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2018. 2. 12. 06:00

 

 

! 저기 야채 판다!”라고 말을 하자마자 일본인 친구가 급작스럽게 차를 갓길에 세운다. 그리고는 허허벌판에 웬 야채가게?’라고 내가 묻기도 전에 친구는 이미 지갑을 들고 쏜살같이 내려버렸다. 창밖을 보니 가판대 하나만 덜렁 있다.

 

그 위에는 무, 당근, 콩 등의 야채와 ‘1개에 100이라고 적힌 종이, 그리고 저금통이 놓여 있었다. 일본 시골길에 있는 무인 야채 가판대였던 것이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가판대를 요리조리 살펴보는 중, 친구는 이미 저 멀리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가서 다른 야채를 문의중이다. 나도 함께 인사하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밭도 구경시켜주고 직접 무도 뽑아보라신다. 그리고 뽑은 야채들을 공짜로 주시는데 둘이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받아들고는 차에 타기 전 돈을 몰래 저금통에 넣고 서로 키득키득 거렸다.

 

때는 11월 중순. 추수의 시기를 맞이하여 길을 따라 제법 많은 무인 가판대들이 보였다. 아마 인적도, 차도 거의 없는 시골 마을에서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분들이 시장까지 팔러 나가기 힘들 때 사용하는 방법인 듯 했는데 양심에 맡기는 만큼 서로간의 신뢰가 대단해 보였다.

 

또 다른 가판대에서도 내렸는데 그 너머 집 마당에서는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야채를 손질하고 있었다.

 

내가 어색한 일본어로 한국인이라고 밝히자 갑자기 눈이 커다래지더니 내 손을 꽉 잡고 눈을 떼질 못했다. 친구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한국인을, 아니 외국인을 처음 보셨대.’란다.

 

일본에서 외국인이 처음이라니?’ 나도 깜짝 놀라 할머니를 쳐다보니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쁨, 놀람이 가득했고, 동시에 마주잡은 손을 통해서 그간의 기나긴 세월, 견디기 힘들었던 외로움, 적적함 등 여러 가지의 감정들이 물줄기처럼 쏟아져왔다.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만큼 순수하고도 온전히 느껴지는 것들에 나도 그 손을 꼬옥 잡았고, 한동안 우리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할머니는 손녀들이 온 것 같다면서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것저것 야채를 챙겨주셨고, 5천원도 안 되는 가격에 야채 봉지를 3개나 주셨다. 일본 가고시마의 한 시골길에서 만난 3명의 우연한 만남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던 우리는 서로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렇게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의 새로운 발견이나 기쁨)’를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자극에 중독되면서 더욱 새로운 것을 보고, 발견하고, 경험하고자 계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가령 길을 잃은 골목길에 놓인 무료책(free-book)들 속에서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하거나, 모로코 식당에서 한국인 남자친구가 있다며 수줍게 한국어로 인사하는 귀여운 소녀를 만날 때나, 러시아의 피아노 연주가와 한국인의 아리랑 노래가 즉석으로 어우러지는 것을 볼 때 등.

 

이런 크고 작은 뜻밖의 즐거움들이 모여 여행은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마약이 되는 것 같다. [방수윤]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