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 리포트2018. 4. 10. 06:00

 

 

지난 1월의 중남미 출장. 22일간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여정의 마지막 방문국은 멕시코였다. ‘황금으로 뒤덮여 있었고, 황금 때문에 멸망했고, 황금의 추억으로 살아간다.’는 멕시코시티 투어를 마친 후 꿈의 휴양지로 불리는 유카탄 반도의 칸쿤으로 향했다.

 

그리고 치첸이사를 답사하는 날, 현대인들도 놀랄 만큼 수준 높은 문명을 일군 마야의 유적지이기에 장거리 이동 중 가이드가 들려줄 고대 마야 문명의 미스터리가 기대됐다. 하지만 가이드는 뜬금없이 주변에 보이는 선인장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에네켄은 잎 모양이 용의 혀와 같다고 해서 용설란(龍舌蘭)이라 불리는 열대 선인장이다. 이 식물 잎의 껍질을 벗겨낼 때 나오는 강하고 질긴 섬유질은 가방이나 해먹 등을 만들 때 사용된다. 에네켄(Henequén), 가만 생각해보면 많이 익숙한 단어다. 나는 오래 전 우리나라의 멕시코 이민자를 가리키던 애니깽이 에네켄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챘다.

 

지금 에네켄 산업은 사양화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엔 선박 화물운송이 증가함에 따라 선박용 로프의 원재료로 호황을 누렸다. 고된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이 산업은 대개 외국에서 부족한 인력을 끌어왔는데, 190544일 우리나라에서도 1,033명의 조선인들이 부푼 꿈을 안고 인천의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이들은 "묵서가(墨西哥, 멕시코)에서 4년만 일하면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는 신문 광고를 믿고 40여 일 간의 험한 뱃길로 어렵사리 멕시코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을 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사기 이민이었다. 이들은 에네켄 산업 현장에서 노예 취급을 받았다. 이들이 이 비참한 생활을 견딘 유일한 힘은 4년의 계약 기간을 마치면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였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었다.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의 여권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멕시코에 남게 된 애니깽들은 다시 생존을 위해 쿠바로 건너가거나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져 정착했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이 오늘날 4만 명이 넘는 한인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멕시코에 갈 때 신비로운 고대 문명의 유적을 방문하거나, 에메랄드 빛 카리브 해변에서의 휴양을 기대할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하지만 상상조차 어려운 고된 생활에서도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조국의 독립 자금 마련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멕시코 이민 1세대, 애니깽의 역사는 기대하지 않았던 멕시코의 또 다른 이야기였다. [이영미]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