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찬의 여행편지2019. 1. 21. 06:00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 자연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 또한 갈수록 이 말에 공감이 커져가니 내 청춘은 점점 더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나보다.

 

최근엔 자연 중에서도, 특히 예전에는 관심조차 없던 꽃들이 슬며시 내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와 마치 원래 제 자리였던 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꽃은 결코 여행의 주연이 될 수 없으며, 여행에 색을 입히는 배경화면 정도의 역할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자꾸만 꽃이 눈에 들어오고 은근슬쩍 관심도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야생화가 여행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동이 있는, 그리고 스토리가 있는, 이른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일으키는 꽃밭은 그 어떤 화려한 건축물이나 유적보다 더 진한 울림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의 포스트벅 야생화 보호구역은 지금까지 내가 본 곳 중에 가장 광활한 꽃밭이다. 야생화들이 지평선 너머 아스라한 곳까지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장관이 숨을 막히게 한다. 대서양의 칼바람이 불어대는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꽃들이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그리고 캄차카 반도 아바친스키 화산의 거칠고 투박한 바위 틈새에서 보석처럼 피어난 야생화들의 군락 또한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바위를 뚫고 몸부림치며 질기고 모진 생명을 피워낸 꽃들이기에 그 어떤 서사시보다 큰 감흥을 일으킨다. 반면에 중국 운남성과 귀주성, 청해성 일대에 피어난 광활한 유채꽃밭들은 인간의 힘든 노동의 결실이기에 축제분위기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다.

 

또한 시칠리아나 요르단의 고대 유적지 틈새에 피어난 빨간 개양귀비 꽃, 말 잔등에 앉아 내려다보는 몽골 흡수골의 야생화들, 알프스의 초지를 뒤덮은 노란 민들레, 빙하를 배경으로 아이슬란드에 흐드러진 보랏빛 루핀 꽃들. 돌이켜 보면 여행 중에 만난 꽃들은 여행의 배경화면이 아니라 메인화면이었던 것 같다. 단지 그때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꽃이 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년에 새로 선보이는 여러 상품들은 이 주제인 곳이 많다. 네덜란드 큐겐호프 꽃 축제, 일본 등나무 꽃 축제와 네모필라 화원, 남프랑스 라벤더 꽃밭, 수국(水菊)으로 유명한 대서양의 아조레스제도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지난 9월에 아조레스로 사전답사를 다녀왔다. 기왕이면 수국이 흐드러진 지역으로 동선을 잡을 요량으로 미리 살펴보러 간 것이다. 하지만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맹렬한 기세로 피어난 수국이 섬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덮고 있었기에 수국이 없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국 사이사이에 온갖 기화요초가 피어있어 판타지 영화에나 나옴직한 화원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조레스의 메인화면은 일단 수국으로 화려하게 장식될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무심하게 생각했던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내 여행에 있어 꽃은 분명 어떤 의미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경찬]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