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 리포트2019. 8. 8. 06:30

 

 

올해 초, 3년 넘게 살던 집을 떠나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그동안 출장지에서 사왔던 기념품이 생각보다 많아 한참을 자리에 앉아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다 방 한구석에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박스가 하나 있어 열어보니 사놓기만 하고 뜯지도 않은 ‘명화그리기’ DIY 세트가 있었다. 언젠가의 가을, 북프랑스 여행길에서 고흐의 작품에 나오는 ‘오베르의 교회’를 본 뒤 직접 채색해 내 방에 걸어놓겠다는 굳은 의지로 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사와 일로 바쁘다보니 이걸 또 잊고 있었다.

 

 

 

그러나 남프랑스 출장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저번 주말, 청소를 하다가 다시 마주친 그리기세트를 보니 올해는 꼭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는 분명 남프랑스에서 마주쳤던 고흐의 흔적 때문이었으리라.

 

남프랑스 여행의 3일차, 아비뇽을 떠나 아를로 이동했다. 파리 생활에 지친 고흐가 아를에 내려와 느꼈던 강렬한 태양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다. 손님들을 모시고 고흐가 귀를 자르고 치료받았던 아를 병원과 싸구려 압생트를 마시며 고뇌했을 밤의 카페를 지나 원형경기장까지 걸어갔다. 아를의 명소인 그리스 극장까지 재빠르게 본 뒤, 밤의 카페로 돌아와 노란 벽을 배경으로 앉아 커피 한 잔씩을 마셨다.

 

맛없고, 불친절하고, 비싸기까지 하지만, 거장의 작품의 배경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업 중인 카페를 고흐가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며 아를 외곽에 있는 도개교를 마지막으로 보고 생 레미로 향했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 일정에 없던 생 레미 외곽에 있는 생폴 드 모졸 수도원에 잠시 들렀다. 외롭고 인정받지 못했던 고흐는 이곳에서 요양하며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자화상’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2층으로 올라가니 요양원엔 아직도 고흐가 생활했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온 환한 그 방에 들어서니 고흐가 생을 마감한 오베르의 어두컴컴한 하숙방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요양원을 떠나고 두 달 뒤, 고흐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생 레미의 전원호텔에서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일정은 버려진 채석장을 거대한 작품으로 변모시킨 ‘빛의 채석장’에서 시작되었다. 마침 올해는 고흐의 작품이 주된 테마였다. 그의 초창기부터 마지막 시기까지의 작품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며 전날부터 이어진 고흐의 흔적 찾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바쁜 성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올해는 꼭 ‘오베르의 교회’를 완성하리라. [임윤진]

 

Posted by 테마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