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2010. 11. 3. 07:00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첫 여행지가, 또 어떤 분은 그 여행을 함께 한 옛날 애인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한텐 여행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항상 강원도 산골에서 만난 아낙네의 뒷모습이 첫번째 이미지입니다. 

구름이 대문으로 들어와 창문으로 나가는 동네

오래전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한겨울에 혼자 여행을 떠났습니다. 정해진 틀에 맞춰 살아야 하는 군생활에 질려버린터라 그냥 생각나는대로, 그냥 마음가는대로 해보겠다고 작정한 여행이었습니다. 떠난지 며칠 후 난 경상도 울진 위쪽의 바닷가 마을인 호산에 있었습니다. 기사식당에서 저녁 겸 반주 한잔 하고 있는데 TV에서 다음날 폭설이 내릴거라는 일기예보가 나왔습니다. 이 얘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눈덮인 태백산이 올라가고 싶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난 호산에서 태백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근데 혹 통리(通里)라는 마을을 아시나요? 구름이 대문으로 들어왔다가 창문으로 빠져나간다, 즉 통한다 해서 통리라고 했다는 산골마을입니다. 
일기예보대로 아침부터 눈발이 날리더니 버스가 통리에 이르자 폭설로 바뀌었습니다. 핸드폰이 있던 시대가 아닌지라 버스 기사는 태백에서 넘어오는 버스가 오면 도로상황을 확인한 다음 계속 길을 갈지를 정하겠다 합니다. 정류장에서 지체하는 사이, 몇몇의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내리고 합니다. 근데 막 다시 버스가 출발하려던 찰나 눈을 흠뻑 뒤집어 쓴 한 아낙네가 급히 버스에 오릅니다. 아기를 업은듯 한데 눈에 맞을새라 포대기를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 써서 아기가 보이진 않습니다.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산골 아줌마 입니다.   

눈 퍼붓는 날 아낙의 손에 들린 이광조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내 옆을 이 아낙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뒷짐 진 손엔 비닐 봉다리가 하나 들려 있습니다. '오늘 저녁 찬거리 사가는 모양이구나. 생선인가?'

얼핏보니 생선이라기엔 봉다리가 납작해 보입니다. 뭘 사갈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봉다리에 따라갑니다.
풀빵인가..?
어? 저건....?!!

봉다리속에 들은건 털끝만치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광조 LP'

생선도 아니고, 채소도 아니고, 풀빵도 아니고 이광조 LP.
이 눈 퍼붓는 날에 순전히 이광조 노래가 듣고 싶어 레코드판을 사러 나왔구나...!

물론 산골 아낙네라고 이광조 노래를 듣지 말라는 법 없지요. 더구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등을 부르며 당시 최고 인기 가수중 한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나에게 이 장면은 너무나 신선했습니다.
'폭설로 교통편까지 끊어질 지도 모르는 날, 아기를 업은 산골아낙네의 손에 달랑달랑 들려 있는 이광조의 노래.' 
이 장면은 나의 뇌리에 깊숙히 박히게 되었고, 이후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가게 되면 꼭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행하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요? 


Posted by 테마세이